침묵과 사유
온몸을 뜰의 허공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한 사내가 하늘의 침묵을 이마에 얹고 서 있다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힌다
침묵은 돌에도 잘 스민다
사내의 이마 위에서 그리고 이마 밑에서
침묵과 허공은 서로 잘 스며서 투명하다
그 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좌우로 물살을 나누며
사내 앞까지 와서는 급하게 우회전해 나아간다
그래도 침묵은 좌우로 갈라지지 않고
잎에 닿으면 잎이 되고
가지에 닿으면 가지가 된다
사내는 몸속에 있던 그림자를 밖으로 꺼내
뜰 위에 놓고 말이 없다
그림자에 덮힌 침묵은 어둑하게 누워 있고
허공은 사내의 등에서 가파르다
《오규원.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2005)「하늘과 침묵」전문 》
몸이 아픈 한 남자/시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불편한 몸을 끌고 그 남자는 뜰에 나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사방의 소리는 모두 가라앉았다. 침묵만이 그 곳의 주인이고, 유일한 물질이다.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침묵도 드디어 물질이 된다. 그래서 ‘침묵은 아무 곳에나 잘 얹히고 돌에도 잘 스민다.’ 어디 돌 뿐이겠는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마 위에도 침묵은 얹힌다. 무겁지만은 않다.
침묵을 향해 잠자리들이 날아온다. 잠자리들은 소리가 없어 그 침묵을 관통해 지나갈 수 없다. 그저 바라본다. 잠자리들은 소리가 없지만 침묵 이전이다. 그러나 침묵은 물질이면서 또한 물질성이어서 그 침묵으로 하여 나무의 이파리들과 가지들이 이파리와 가지들로 드러난다. 아니 스스로인 스스로가 된다. 침묵 속에서 몸이 아픈 남자/시인은 몸속의 아픔과 마음속의 혼란스런 그림자를 밖으로 드러낸다. 나무들이 그 그림자를 보고 있다. 침묵보다 그림자가 무겁다. 하지만 침묵으로 하여 그림자는 어둑해질 때까지 편안해 진다. 비록 등 뒤의 허공은 가파른 현실일지라도 그림자는 침묵 속에서 사유한다.
시인은 죽음을 기다리는 자일까? 시는 세상을 외면한 ‘침묵’의 뜰일까?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정신의 삶-사유』의 첫 페이지를 그리스의 카토(BC234-BC149)를 인용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을 때 그 어느 때보다 활동적이며 혼자 있을 때 가장 덜 외롭다.”
아렌트는 관조적인 삶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활동적인 삶으로서의 정치 행위를 경시하던 플라톤 이후의 전통을 비판해 왔다. 그녀는 인간의 공동체 내에서 인간들이 어떻게 진정한 정치적 삶을 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침묵과 사유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적 삶이 정치적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토가 옳다고 상정할 경우에...우리가 단지 사유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행하고 있는 것일까?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우리는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시인은 허무주의자가 아니다. 시는 수사적 장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침묵 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사유하는 것일까? 허공 속에서 시는 어디로 미끄러지는 것일까? 이것만은 분명하다. 시인은 영원히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죽음마저도 공유되고 우리는 또 그것을 공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