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야기는 예수께서 고향에서 배척당하신 사건과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세상에 파송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집요하게 복음말씀 이면에는 제국을 비판하고 그들의 위세를 풍자하는 한편, 예수의 하나님나라가 제국과 어떻게 다른가를 증거한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두 나라 중 어떤 나라가 민중에게 행복한 나라인가를 제시하여서 하나님나라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목적이 있다. 오늘 말씀에서는 어떤 면이 그러한가?
우선 복음말씀을 요약하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을 방문하시어, 늘 하던 대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고향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놀라기는 하면서도, 예수의 가족이 자기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의 지혜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호응이 있어야 이적도 자연스럽게 나올텐데) 고향 사람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서 예수도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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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향에서 쫓겨난 예수 [출처 : bible119.com] | | |
여기서 그 유명한 경구 "선지자가 고향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 않는 곳이 없다"가 나왔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악한 귀신을 억누르는 권능을 주고, 하나님나라를 증거하라는 사명을 주어서 이스라엘 곳곳으로 보내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빵도 자루도 돈도, 여벌 옷도, 그 무엇도 지니지 못하게 하셨다. (한마디로 빌어먹게 하셨다) 제자들은 가서 귀신을 쫓아내며 병자를 고쳐주었다.
오늘 말씀에 두 나라가 비교되는 면이 무엇인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고향사람들은 예수를 배척했을까? 어째서 예수는 제자들을 그토록 지지리 궁상으로 파견하셨을까? 이 두 가지를 설명하면 자연스럽게 제국과 비교점이 나올 것이다.
황제가 움직이면 그 수하들이 줄줄이 따라간다. 황제가 어느 마을에서 연설한다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지금도 권력자가 어디를 방문할라치면 이미 그곳은 권력자의 의중대로 하수인들이 충분히 빠다칠을 해 놓는다. 사람은 진정이든 가식이든 최선을 다해 황제에게 쌍수를 들어 온 마음과 온몸으로 충성과 존경을 보내야 한다. 그게 살 길이다. 고개를 외로 꼰다? 야유를 날린다? 딴짓을 한다? 한번 그렇게 해 보라. 어떻게 되는가. 자발적이든 강요된 것이든 지상권력 앞에 철저히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예외 없이 나타나는 광경이다. 게다가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가 붙는 신적 존재 아닌가?
1절 말씀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서 고향에 가시니, 제자들도 따라갔다"는 바로 황제가 떴을 때의 풍경, 수하가 따라붙고, 행렬은 온갖 요란함으로 치장하고, 사람들에게는 강요된 복종을 요구하는 권력의 허세를 풍자하려는 의도가 조용히 숨어 있다.
예수도 그렇게 행차를 하신다. 제자들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그런데 고향 사람들은 예수의 모친, 형제, 누이들이 자기들과 같이 살고 있다는 이유로 예수를 거부한다.
황제라고 가족, 친족이 없을까? 처음부터 황제가 아니었기에 그들도 처음에는 어디에서든 나고 자랐을 터! 다 일가붙이가 살던 고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향 사람들은 예수께 모질게 했을까? 탐욕의 이너서클 집단이 아니어서이다. 다른 말로 네트워크, 커넥션, 카르텔이 부실해서이다. 뭐가 좀 있어 보여야 환영하는 척하며 뒤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을 것이 아닌가? 만사형통으로 불리던 사람의 도시는 공적예산이 수조 원이 따라 붙었다고 하지 않는가? 예수께는 그런 게 없었다. 그러니 찬밥일 수밖에.
하지만 예수는 이에 대해 뭐라 하지 않는다. 전적으로 그들의 판단과 선택에 맡긴다. 황제가 그런 대접을 받았다면, 살육의 칼부림이 일어났을 테지만, 예수는 자신이 섭섭해 하는 것으로 조용히 끝난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진실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참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인식의 어두움, 연고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분별의 둔함. 그 까닭에 고향의 병자들도 불이익을 겪었다. 다만 몇몇 병자만 고쳐 주신 것밖에는 아무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을 사람을 알아보는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그다음 이야기가 단서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완전 빈손으로 보낸 이유, 빌어먹어야 살 수 있도록, 전적으로 남의 호의를 입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도록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제국의 관료와 비교해 보자. 황제의 명을 받아 어느 지역에 파견 나온 관료가 있다고 하자. 그는 어떤 심보로 갈까? 그리고 그를 맞이하는 지역 사람들의 심사는 어떨까?
로마에는 후견인제도라는 게 있다. 그들만의 커넥션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구조다. 관료는 지역순회를 한밑천 잡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자기 몫, 황제 몫, 후견인 몫, 또 자기 꼬붕 몫까지. 그러니 그런 놈들을 맞이하는 지역의 유지들 심정은 어떨까?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그러나 지역유지들도 로마와 어느정도 끈을 유지해야 살 수 있으므로, 또 지역관리는 이 기회에 중앙정계 진출의 기회로 삼을 것이기에, 결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니 권력들 요구사항 대 주느라 죽어나는 것은 민중들뿐이다.
그렇게 황제 관료의 방문에 진저리, 넌더리가 나 있는 민중들 앞에 또 누가 외지에서 왔다면, 민중들은 다짜고짜 거부감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복음증거를 단념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도 하나님나라를 증거해야 한다. 그렇다면 다른 모습으로 가야 한다. 관료들과 정반대의 행색으로, 겸손하고 낮은 자세로, 갖다 바쳐! 하고 호통하는 태도에 질려버린 민중들에게 거렁뱅이 차림새로 동정과 호의를 입도록 한다면, 그들도 마음을 열 것이다.
그래서 복음 저자는 제국의 횡포를 떠올리며 제자들의 파견은 이렇게 다르다는 것을 증언한다. 칼이나 창 대신에 지팡이를 들었으니, 자기들을 해칠 사람은 아니라고 안심할 것이다. 돈주머니가 안 보이니 그 속에 채워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신발이 군화가 아니고, 다 떨어져 너덜거리니 마음이 놓인다. 무엇보다도 옷 한 벌뿐인, 차림새가 남루하니 자기들을 해칠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외모에 현혹당하지 않고, 그렇게 날 것 그대로 사람 대 사람이 만나야 거기서 진짜 관계가 싹트는 법이다. 하나님나라가 순수하게 전파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이중목적으로 제자들을 거렁뱅이로 무장시킨 것이다. 민중들 마음의 빗장을 열게 하기 위해, 또 스펙이나 치장, 연고 같은 외모 배경 없이, 날 것 그대로 다가 갔을 때, 복음의 진가가 드러나기 때문에.
그래야 하나님나라 복음도 권위를 갖는다. "너희의 말을 듣지 않거든, 그곳을 떠날 때에 너희의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서, 그들을 고발한 증거물로 삼아라"(마가 6:11) 당당할 때 이렇게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들이 한 마을에 머물 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얼마나 철저히 청렴, 청빈의 도를 사수했는지 한 전승을 보자.
"어느 사도든 여러분에게 오면 주님처럼 영접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만 머물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다음날도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흘을 머무른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음 장소에서 숙박할 때까지 필요한 빵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이상이 오늘 복음말씀이 담고 있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를 오늘날 우리 현실에 적용하자니, 아득하기만 하다. 원조와 현실의 격차가 너무도 벌어졌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의를 규정한다고 했지만, 현대는 외모가 내용을 규정하는 시대가 돼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정말 외모가 나를, 우리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외모에 현혹당해서 내용의 진가까지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안 된다. 하늘의 은총으로 맘몬과 권력의 쓰나미 속에서라도 사람과 사물을 참되게 분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