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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08월07일 14시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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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백목사의 예수읽기 (4)
마가복음 6:30-34, 53-56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오늘 제목은 싱겁기 그지없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리시다...' 이게 뭐 어떻다는 말인가? 일단 복음말씀 내용을 요약하자. 앞부분(30-34절) 요지는 "예수님이 파송한 사도들이 각지에서 돌아오자, 예수께서 노고를 치하하고, 조용한 데 가서 쉬라고 하셨다. 이유는 오가는 사람이 하도 많아서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딴곳으로 떠나갔는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일행을 알아보고, 사방에서 그곳까지 따라와서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 그 무리들을 보시니 목자 없는 양 같아서 연민이 샘솟아서 (쉼도 잊어버리고)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뒷부분(53-56절) 요지는 "(역시) 예수일행이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알아보고, 온 사방을 뛰어다니면서 병자를 데려와서 고침을 간청하였고, 예수께서 손을 대니 모두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이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민중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여 가는 곳마다 몰려들었고, 그렇게 몰려드는 민중들을 마다치 않고 예수님은 그들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셨다는 거다.
 
그런데 두 이야기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한 장면이 있다. 바로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서..."이다. 복음저자는 제국의 폭력을 고발하고, 예수가 퍼뜨리는 하나님나라를 대조하는 의도를 복음서술에 깔아놓았다고 했다. 이 지극히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 장면이 뭘 암시한다고?

그렇다면 다른 모양의  배에서 내림을 보자.

콜롬버스와 그의 계승자들이 아메리카 땅에 당도하여 배에서 내린 순간부터 한 일이라고는 약탈, 학살, 인종 말살이었다. 1508년 라스 카사스는 이렇게 증언했다. "1494년~1508년까지 300만 명 이상이 전쟁과 광산, 노예 노동으로 사라졌다"라고. 그러나 미국 역사책에는 이 모든 것이 유혈이 전혀 없는 영웅의 모험담으로 꾸며져 있고, 1492년 10월 12일 콜롬버스 기념일은 축제일로 돼 있다고 하워드 진은 <미국민중사>에서 고발한다.
 
광복절 직후 미군이 배에서 내려 이남 땅에 진주할 때, 민중들은 열렬히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미군이 우리를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고마운 군대라는 감사를 담아서. 그러나 그 기대는 곧바로 깨졌다. 맥아더는 포고령 1호에서 점령군으로 이남 땅을 지배한다고 분명히 했다. 그 이후 몰려든 민중들은 미군들에게 일제억압 못지않게 발가벗겨 졌다. 해방 이후 최초의 인민항쟁인 대구 10월항쟁은 일제 때와 전혀 달라진 것 없는 미군정 통치에 대한 저항이었다.
 
배에서 내린 세력들의 폭력은 제주4.3항쟁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미군의 명령을 받는 토벌대, 민병대는 당시 제주도민 30만 명 중 1/10를 살해했다. 역사는 반복하는가?

2007년 음모와 협잡으로 제주강정마을을 미해군기지터로 진상하기로 한 정부는 그 이후 강정공동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와중에 천혜의 구럼비바위도 날려버렸다. 삼성물산과 대림은 탐욕을 현실화해주는 각종 중장비를 배에서 내렸다. 경찰은 기동대를 배에서 내렸다. 기동대는 철저히 해적기지 용역으로 전락해 버렸고, 해적기지 공사장 주변을 법치주의가 짓밟힌 국가폭력의 장으로 상설화해버렸다. 이처럼 배에서 내린 세력들-정부, 해군, 건설자본, 경찰은 모두 세트가 돼서 강정의 평화를 유린했다.
 
이처럼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다 같은 게 아니다. 진심으로 민중을 위하는 사람들이 있고, 민중은 안중에 없이 오직 자기들의 탐욕세계유지확장을 위해 민중을 짓밟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배만 상정했지만, 오늘날 이 탈것을 차와 비행기로 확대시키면 평화를 침탈하는 세력들의 음모와 물리력은 더욱 확장된다. 그만큼 민중들의 고통과 신음은 늘어만 가고.

민중들의 속성이 원래 권력에게 잘 몰려드는 속성이 있다. 양을 보라. 그들은 항상 떼를 지어 다닌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당신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특별설정했을까. 예수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같아서 연민이 치솟았다. 양을 이끄는 목자가 어떤 사람이냐가 양들의 생사를 좌우하듯이, 민중을 이끄는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민중은 보호를 받든지, 벗김을 당하든지 한다.

그러므로 민중들이 세상물리, 특히 권력의 실체를 깨우치는 일은 그들 생존을 위해서라도 너무너무 절실하다. 그렇기때문에 예수께서는 쉼도 잊어버리고 민중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쉼도 잊어버리고 설파하신 거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권력과 자본의 지배논리를 복음과 섞어서 은밀히 교묘하게 민중들에게 주입해 버린지 오래됐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체제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정도로 지배권력과 한몸이 돼 버렸으니,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앙고백이 진실로 부끄럽고 무색해져 버렸다.

우리가 겪어봐서 알지만, 민중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박정희향수에 젖어서 그의 딸을 맹목적으로 지지찬양하는 민중도 천지빼깔이다. 전두환이 민중을 학살하고 권력까지 찬탈한 게 너무도 좋아보여서 그 학교 동문들은 그에게 절을 하고 분열을 하고 심지어 기념관까지 만들어 갖다 바친다. 그 권력자가 자기를 발가벗기는 원흉인 줄도 모르고. 예수께서는 이런 민중들에게 권력의 지배에서 자유로운 하늘의 도를 설파하셨을 게 분명하다. 그리고 깨우친 민중들은 권력과 율법의 지배사슬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독립적 영혼으로 거듭났고, 예수의 제자가 돼서 함께 하나님나라, 평등세상 운동의 전위대가 됐다.

그렇게 거듭난 민중들의 달라진 모습이 뒷부분이다. 예수일행이 오셨다니까 흥분되고 기쁜 마음에 한 사람이라도 더 그 영향권에 모시고 싶어서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사람들을 조직한 거다. 특히 무엇보다도 은총이 절실한 병자들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에 초대해야 할 일순위 대상자이므로 병자들을 집중적으로 조직한 거다.

이런 자발적이고 각성한 민중들이 세상을 바꾼다. 앞에서 권력이 배에서 내려서 강정을 유린하였다고 성토했지만, 전혀 다른 하선이 있다. 7월 30일부터 일주일동안 강정의 촌노들이, 제주도민들이 또 전국에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모여들었다. 비행기에서 배에서 내렸다. 이름하여 '강정평화대행진'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강정마을이 다시 평화를 되찾기를 열망하여서 '평화가 길' 문구가 적힌 셔츠를 입고, '해군기지 결사반대'라는 깃발을 들고, 작열하는 태양,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알배긴 다리, 물집 잡힌 발에 구애받지 않고, 제주도를 걷고 또 걸었다. 연 인원 7,000명이 그렇게 했다.

▲ 출처 : 참세상

8월 4일 토요일에는 제주시 제일 넓은 광장에 모여서 함께 함성을 질렀다. 해군기지를 백지화하고 강정을 평화마을로 되돌리라고. 또 강정평화대행진의 기세를 살려서 이번에는 전국대행진을 하자고 기운을 모락모락 피우는 중이다. 이번처럼 영남 동편길, 호남 서편길로 해서 대전에서 합류하여 서울, 청와대까지 10만 명이 행진하자는 대강 안까지 나왔다.

똑같이 차에서, 배에서, 비행기에서 내리지만, 오직 자기세계 탐욕유지 확장을 위해 민중을 발가벗기는 권력과 자본같은 세력만 있는 게 아니다. 민중이 수탈당하는 현실이 애가 닳아서, 누가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온 지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마을이든, 도시이든, 농촌이든, 어디던지간에, 사람들을 새 세상으로 안내하기 위해 조직하고 연대하고 함께 세상을 바꾸기 위해 자신을 바치는 자발적 민중도 있는 것이다.
 
예수는 그 자발적 민중의 선두에 계시다. 이게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원래 모습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이 분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교회주류에 비하면 턱도 없는 소수이지만, 이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생명력을 유지한다. 알아보는 식별력이 있기를! 이분을 증언할 수 있어서 조으다.
 

백창욱(대구새민족교회) baek08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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