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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관리툴 2012년08월04일 02시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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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날] 시인의 시간 (2)
호양나무의 시간, 시간의 호양나무

노태맹(시인) arche38@hanmail.net

호양나무는 삼천 년을 산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선 채로 천 년, 그리고 쓰러져서 천 년이다 천 년을 보낸다는 건 하염없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흑수성 근처 고비 사막에서 호양나무 수림은 정처없는 서하의 옛 문자를 더듬어 의성어를 얻었다 풍화와 침식을 반복하는 건 늙은 호양나무만은 아니겠다 평생에 단 몇 번 물길을 실어보내는 와디라는 사막의 강도 있다 그건 물의 발가락이거나 발톱이다 마지막 천 년을 보내면서 공복과 모래를 뒤섞는 나무에 기대면 사막의 시간은 참 미묘하구나 햇빛 많은 날, 해바라기씨를 까먹으며 옛 나라 옛 땅은 차츰 목질에 가까워져서 나무가 기억하는 건 나도 아슴아슴 떠올린다

(송재학. 「호양 나무 수림」)

戈壁灘上的胡楊樹 活着千年不死 死了千年不倒 倒了千年不朽 (고비 사막 위의 호양나무 살아 천 년 죽지 않고, 죽어 천 년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 천 년 썩지 않네.) 시인은 고비 사막에서 호양나무를 보며 누군가로부터 호양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고비 사막이 위치한 중국 북서부 지방에 과거 西夏(1038년-1227년)라는 티베트계의 나라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호양나무 이야기와 섞인다. 눈을 들면 사막에 물 마른 강의 흔적이 보인다. 비가 올 때만 강이 되는 와디이다. 모래에 묻힌 채 사라지고 있는 호양나무가 시인의 허기와 겹쳐진다. 호양나무에 기대어 해바라기씨를 까먹는 시인은 점점 호양나무의 수 천 년을 거슬러 더듬을 수 있을 듯하다. 아니다. 어쩌면 쓰러져 누운 호양나무가 시인의 몸을 빌려 내려와 시인이 호양나무가 되고, 마침내 시인은 호양나무의 마지막 기억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미묘한 시간. 그렇다. 시간은 그리고 과거는 단지 회상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시간도 회상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시간은 단지 펼쳐질 뿐이다. 아름다움/슬픔은 시인의 작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시인을 통해 펼쳐지고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나타난다. 시는 잠언이 아니다. 시인은 옳은 이야기, 따뜻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인의 시간은 통시적이고 잘 위계 잡힌 질서가 아니다. 시인의 시간은 울퉁불퉁한 우리 모두의 과거 전체이다. 베르그송의 말처럼 “각각의 현행적 현재는 지극한 수축 상태의 과거 전체”이다. 그 과거는 정신의 흔적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구워진 불온한 물질들이다.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는 시간의 한 차원에 머물기는커녕 시간 전체의 종합이며, 현재와 미래는 단지 그 종합에 속하는 차원들에 불과하다. 따라서 ‘과거가 있었다’라는 말은 성립할 수 없다. 과거는 다시는 실존하지 않는다. 과거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면서 내속하고 공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있다. 과거는 사라진 현재 속에 내속하고, 현행적 현재나 새로운 현재와 더불어 공속한다.”

시인은 과거를 ‘하염없이 생각’하거나 ‘아슴아슴 떠올’리며 현재를 더듬는다. 그것이 시인이 시인일 수 있는 방식이고 시간과 만나는 방식이다. 또한, 호양나무는 그 어떤 시인을 사유하고 그 어떤 시인을 기다리는 과거의 내속과 공속으로서의 현재이다. 여기서 순환적이고 인과적인 시간은 잊자. 시인과 호양나무와의 만남은 순전한 우발이지만 그 우발성 속에서 시인의 시간과 호양나무의 시간은 뒤섞인다.  ‘옛 나라 옛 땅이 차츰 목질에 가까워’진다는 과장은 그대로 받아들이자. 다만 ‘나무가 기억하는 건 나도 아슴아슴 떠올린다’는 시인의 진실성만은 믿기로 하자. 그리고 ‘그 것’이 무엇이냐고 묻지는 말자. 왜냐하면 시인은 언제나 입구에 서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들어가면, 죽는다.
 

노태맹(시인) arche3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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