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 “사진 하면 대구의 최계복이고 회령의 정도선”이라는 평판이 자자했다. 그만큼 유명했던 사진작가 <최계복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사진집>이 2009년 10월 28일 발간됐다. 사진집의 표지가 바로 그의 최초 작품인 ‘영선못의 봄’이다. 1933년 작 ‘영선못의 봄’을 보면, 잘 차려입은 여인네들과 중절모에 양복으로 성장한 신사들이 유람선에 올라 뱃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만큼 영선못이 컸던 것이다.
지금부터 30여 년 전만 해도 대구에는 큰 호수들이 곳곳에 많았다. 최계복 사진집에서 보듯이, 명덕로터리 인근에는 영선못이 있었다. 경북대학교 북문 너머에는 배자못도 있었다. 배자못이 ‘운명’하기 직전까지는 감삼동에도 큰 호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파트를 짓는다고 다들 메워버렸다.
좀 더 전에는 서문시장도 커다란 호수였다. 본래 늪이었던 곳이 메워져 장터로 변한 서문시장의 역사에 대해서는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지금의 대구광역시 교육청)가 1988년에 발행한 <우리 고장 대구-지명 유래> 72∽73쪽을 읽어볼 만하다.
“대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시장은 약령시(藥令市)이고, 그 다음은 대구 읍(邑)장이라는 서문시장이다. (중략) 지금부터 60년 전(1928년) 12월 9일에 시장의 서남쪽에 있던 늪을 메우고, 시장을 그곳으로 이전했는데, 그것이 지금의 서문시장이다. (중략) 서문 시장 일대가 낮아서 비가 조금만 와도 물이 차는 이유는 이곳이 옛날 지금의 신천이 흐르던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늪을 메워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서문시장이 지금부터 80년 전만 해도 늪이었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더욱 놀라운 것은 아주 아득한 옛날의 대구는 땅이 아니라 아예 덩어리째로 거대한 호수였다는 사실이다. 이는 곳곳에 남아 있는 공룡발자국과 연흔, 건열 화석지들이 잘 증언해준다. 옛날에 바다나 호숫가였던 곳에 남아 있는 연흔 화석(돌에 새겨진 물결무늬)과 건열 화석(돌이나 흙 위에 희끗희끗하게 생긴 다각형의 무늬)이 앞산 고산골 입구에 뚜렷하게 존재하는 것도 그렇고, 공룡발자국이 고산골 입구와 욱수천의 바위, 신천 등 곳곳에서 계속 발견되는 것도 그 근거이다.
물을 마시러 공룡들이 펄쩍펄쩍 뛰어다니던 거대 호수였지만 대구도 긴 세월이 흐른 뒤에는 이윽고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뽕나무[桑] 밭[田]이 푸른[碧]바다[海]로 변한 상전벽해(桑田碧海)의 생생한 사례가 바로 대구이다.
이에 대해서는, 대구시의 <대구시사>도 ‘(1억 4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의) 대구 시역은 내륙 호수 상태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이화 저 <한국사 이야기> 1권도 ‘공룡이 살던 시기에 (중략) 한반도에는 수십 km에서 수백 km에 이르는 엄청난 호수가 생기기도 했다. 오늘날의 우리는 쉽게 이런 말을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믿어야 한다. 한반도 땅덩어리 자체가 아득한 옛날에는 적도 지방에 있었는데 북상하여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구 일대가 수백km에 이르는 거대 호수였다는 정도야 무에 그리 못 믿을 만큼 대단한 충격도 아니다.
고산골 입구에서 공룡 발자국, 건열, 연흔 화석 들을 확인하는 일은, 백문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잠깐의 시간만 투여하면 곧장 현장에 달려가서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고 믿을 수 있는 간단한 답사이다. 어린 자녀가 있다면 특히 고산골 입구부터 가볼 일이다. 식당가를 지나면 나타나는 등산로 초입 길가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어 찾기도 쉽다.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은 (박물관 방문과 서적 탐독 후) 실물을 확인하는 것이 최선의 교육이자 참된 답사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