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주] 숨어서보지 말고 소문내면서 만화보자. 보면서 멘붕해도 괜찮아. 울어도 괜찮아. 심오해도 괜찮아. 세미나해도 좋아. 만화책도 책인걸~ 멘.붕.독.서
다소 난잡해보일 수 있는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늘어지는 이 장편 전쟁만화는 10대 시절 나를 매료시켰다. <바사라>가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도서대여점에 막 도착한 책의 비닐을 내 손으로 뜯어 본 책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골집이라 그랬겠지만 사장님은 바코드조차 붙이지 않은 새 책을 빌려줬었다. 그 책을 안고 집으로 온 나는 1권과 2권을 눈물 뒤범벅으로 읽었다. 당장 뒷 이야기가 궁금했지만 시간은 이미 깊은 밤이었다. 달달 거리며 해가 뜨길 기다리다 바로 다음날 도서대여점으로 달려갔지만... 3권을 빌릴 수 없었다. 분명 어제 비닐을 뜯을 때 15권까지 있는 것을 확인했었는데! ‘금서’가 되어 대여할 수 없게 되었고, 이미 회수해갔다는 사장님의 설명뿐이었다.
‘금서’라는 말은 내게 참 낯설었다. 당시가 1997년 여름이었는데, 특별히 정치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던 ‘보통의 멍한 청소년’이었던 내게 뭔가 입에서 겉도는 말이었다. 심지어 만화책이?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전 권을 다 읽은 지금에서도 왜 금서가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물론 정사신이 포함되어 있고 전쟁만화이니 전쟁신은 계속 나온다. 하지만 그림체에서 알 수 있다시피 순정만화적 요소가 강한 만화였고 타무라 유미는 권마다 세계지도를 그려넣고 영토분쟁에 대한 각주를 달 정도로 서사에 집착하는 작가라 가상의 세계사 교과서 같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았다. 그런 책이 왜? 라는 의문은 잘 풀리지 않는다. 한국의 금서, 한국의 금지곡이 별다른 이유 없이 선정되니 당연히 의문이 안 풀릴 수밖에 없는 거지만. 쿨럭.
이 책의 제목 ‘바사라(일본어: ばさら)’란 일본의 남북조 시대의 사회풍조 또는 문화적 유행을 나타내는 말이다. 실제 당시 유행어로 사용된 적도 있다는데, 원래의 뜻은 범어의 바즈라(vajra)라는 금강석, 금강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 말이 어떻게 변화하여 문화적 유행어가 되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어쨌든 바사라의 의미는 ‘신분질서를 무시하고 화려한 복장과 행동거지를 즐기는 미의식’ 혹은 ‘하극상적 행동’를 말한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막부의 기본방침인《겐무 식목》을 제정할 때 바사라적 행동을 금했다.
주인공들의 삶에서 ‘바사라’는 느껴진다.
• 주인공 사라사(SARASA)는 15살 여성이다. 부족의 지도자였던 오빠의 죽음을 보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다 마음을 먹고 왕에 대적하는 반군을 이끄는 지도자로 살아가게 된다. 사라사는 그 삶에서 물리적인 자신(15살의 여성)과 사회적인 삶(강건한 남성, 반군 지도자) 사이의 괴리에서 혼란스러워한다. 또한 주변 사람들은 혹시나 사라사의 정체가 밝혀져서 반군의 단결이 흩어질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노력한다. 사라사 그 자신이 원래 지도자였던 오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략가이고 전술가임을 여러 번에 걸쳐 증명해내지만 사라사 스스로조차 자신의 원래 모습대로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사라사의 마음 속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사는 삶은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인가?
• 배경이 되는 나라는 4개의 소국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 나라를 통치하는 왕은 어울리는 색으로 상징되는데, 사라사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사람은 적왕 슈리(SHURI)이다. 전쟁에서 가장 피를 즐기고 가장 잔혹하다는 의미에서 적왕이라 불리는 슈리는 어느 소국보다 국민들이 공포스러워하고 혐오하는 대상이다. 전쟁의 화신이라 불리는 슈리. 하지만 4개 소국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가장 힘없는 왕이었고 왕위계승후보에도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실현하고 싶은 국가에 대한 신념을 갖고 국가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사라사와 만나면서(이 둘은 서로 반군의 지도자와 적왕임을 모르고 '부농부농' 하게 되는 로미오와 줄리엣 격인 사이이다), 자신이 취하고 있는 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신념이 옳다면 수단은 모두 허용될 수 있는가? 허용될 수 있는 악행은 어디까지인가? 실현하고 싶은 국가와 내가 가지고 싶은 국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아게하(AGEHA) 역시 주요 등장인물이다. 노예로 나이조차 불명이다. 성노예로 유년기를 보내고 이후 주인의 아들에게서 구원되어 노예같지 않은 삶을 살아가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이 노예임을 늘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살고 싶은 삶과 죽음을 선택한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가장 ‘바사라’적인 인물일지도... 아게하에게서는 학대받고 존중받지 못하고 산 사람들이 가지는 삶의 공허함과 불안감, 자존감 결핍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이시대 한국인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이 사회는 99%의 사람들을 학대하니까.
그리고 반 년쯤 지나 검열을 거친 수정본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무삭제 완전판이 나와있다. 2004년부터 1권이 무삭제 완전판으로 한국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는데, 이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 사이즈가 커져서 보기는 좋지만 칼라페이지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고 각 권의 끝마다 있었던 서비스 컷이 빠져있어서 오히려 일반판보다 더 많이 삭제되어 보인다.
금서조치로 오염되어 버린 비운의 책이란 느낌이랄까? 심지어 <바사라>는 검색할 때도 쉽지 않다. <전국 바사라>라는 더 유명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전국 바사라>는 일본 전국시대를 바탕으로 하는 만화인데 이후 플레이스테이션 게임과 애니메이션으로까지 제작되어 더 자료가 많고 유명하다. 그래서 내 사랑 <바사라>는 검색하면 <전국 바사라>에 관한 글만 쭉 떠서 날 뭔가 더 안쓰럽게 한다. 훌쩍.
<바사라>는 앞서 말했든 순정만화스러운 전쟁만화이다. 주요 스토리도 사라사와 슈리의 사랑이고 그 사랑을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 시대적 배경과 전쟁이다. 하지만 그 속에서 두 지도자의 정치가 비교된다. 힘으로 자신의 신념을 실현할 수 있는 국가를 장악하고자 하는 슈리. 결국 여성임이 밝혀지지만 이후 다시 사람들에 의해 다시 추대되고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사라사. 왕좌에 앉아있는 모습의 슈리, 논밭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는 사라사. 둘다 군사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려지는 모습은 늘 다르다.
큰 선거가 두 번이나 있는 2012년. 크고 공식적 권력에 대한 갈망이 유난히 거세어지는 해이다. 하지만 <바사라>에서도 말하듯 정말 중요한 것은 크고 강한 권력 근처에는 없는 것 같다. ‘힘’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시면 <바사라> 한번 읽고 엉엉 울어보는 건 어떨까? <바사라>는 심지어 신파도 갖추고 있으니까! 쿄쿄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