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득재의 영화시대] 은교 - 무감無感의 시대는 폭력을 부른다

뾰족한 연필 끝의 위태위태한 우리의 삶
뉴스일자: 2012년05월03일 23시20분

‘뾰족한 연필’이라는 어구로는 시가 탄생하지 못한다. ‘슬프다’라는 단어가 들어가야 비로소 시가 탄생한다. 영화의 대사마냥 ‘뾰족한 연필’과 ‘뾰족한 연필은 슬프다’ 사이에는 이승과 저승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멀고 먼 차이가 있다.

그런데, 왜 슬플까. 뾰족한 연필은 왜 슬플까. 뾰족한 부분이 닳고 닳아 뭉툭해진다는 것, 그것을 예감하고 그 뭉툭해질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슬프다. 날씬한 몸매가 펑퍼짐해질 거라는 사실을 미리 예감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목련이 피어도 개나리가 피어도 기쁘지 않다. 슬프다. 언제 꽃이 지는지 미리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봄비는 싫다. 꽃이 질 거라는 징후의 정체가 봄비이기 때문이다.

▲영화 '은교'의 한 장면

영화 후반부 장면에 뭉툭해진 몽당연필이 여기저기 놓인 장면이 관객의 뇌에 찍힌다. 은교(김고은 분)가 떠나고 난 후 위대한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 분)는 술로 세월을 보내고 뭉툭해지고 둔탁해진 생의 슬픔을 전달하는 장면이다. 뾰족한 연필로 시를 쓰기 위해 수많은 원고지들을 만나 뭉툭해진 연필처럼, 이적요의 생 자체가 뾰족한 생기를 상실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어느 틈엔가 사다리를 타고 이적요의 집 안으로 들어온 은교가 의자에 누워 숨을 몰아쉬고 있을 때 은교는 이불 파헤치고 들어가듯이 이미 이적요의 마음속을 파고들어 왔는지 모른다. 이적요의 시선으로 은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첫 장면은 이적요의 생이 생기로 충만하리라는 암시였다.   

▲ 영화 '은교'의 한 장면

그 후 은교와 같은 헤나를 하고 같은 이불 속에서 은교의 육체를 쳐다보던 이적요는 뾰족한 연필이 뭉툭해지리라는 예감을 하지 못했다. 은교가 엄마한테서 생일 선물로 받은 작은 거울을 찾아주고 은교의 젖은 교복을 드라이기로 말려 줄 때 이적요는 그 운명의 냄새를 전혀 맡지 못했다. 하지만 이적요가 대필로 써 준 소설로 유명해진 서지우(김무열 분) 작가가 스승 이적요에 대한 질투심으로 은교와 정을 나누는 장면을 사다리 타고 훔쳐볼 때 운명은 땅거미처럼 이적요를 찾아 왔다.

닳고 닳을 대로 뭉툭해질 대로 뭉툭해진 문단의 풍경 속에서 서지우는 자기가 쓰지도 않은 소설로 유명해져 있었다. 서지우가 이적요의 집 반다지에 있던 소설 <은교>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고 이상 문학상을 받는 장면은 뾰족한 생기, 뾰족하고 날카로운 감성이 사라진 시대의 모습이다. 그 감성을 도둑질한 자가 생기의 원천인 은교마저 훔쳐 갔을 때 이적요는 슬픔을 소주에 섞어 은교가 떠나간 자신의 육체 속으로 생의 폭탄주를 들이 붓고 있었다.

죽은 듯 누워 있는 이적요 머리맡에 안개꽃을 살포시 내려놓고 떠나간 은교. 엄마에게 맞아 목덜미에 난 상처를 소리 없이 마음으로 안아주던 이적요, 뾰족한 연필 끝처럼 뾰족한 생의 끝에서 위태위태하게 살아오던 은교에게 뭉툭해진 연필처럼 무디게 생을 견디게 해주었던 이적요, 몽당연필처럼 작디작은 은교의 몸, 그러면서도 뾰족한 연필 끝처럼 생의 자극을 주었던 은교의 몸짓과 마음, 뾰족한 연필과 뾰족한 연필은 슬프다 사이에 이승과 저승의 거리가 있듯이 뾰족한 연필과 뭉툭해진 몽당연필 사이에도 이승과 저승 사이만큼이나 먼 거리가 있다. 우리의 생 또한 그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사람들이 뾰족한 연필 끝에서 위태위태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시대다. 스마트한 감성을 핑계거리로 삼아 정작은 날카로운 감성을 상실하고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뾰족뾰족한 삶을 견디느라 뭉툭해진 몽당연필이 되어 고통스러운 시대에 무디게 적응하며 살아가는 시대이기도 하다. 은교의 상처에 시인의 뾰족한 연필 끝을 대려고 했던, 그 후 마침내 소설 <은교>가 완성된 것처럼 아픈 사람들의 상처에 지금 마음의 눈을 대야 하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무감無感의 시대는 폭력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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