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갯소리부터 한마디 하고 글을 시작하자. <국제법>이나 <국제인권법> 수업을 하면서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 아나키스트가 되십시오! 특히 젊을 때는 모두 아나키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하면 학생들의 표정이 다채롭다. 담담하게, 또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하는 친구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긴장한다. 아니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눈동자가 심하게 떨린다.
‘아니, 저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더러 무정부주의자가 되라고? 평소 테러리즘은 국제범죄라느니 법학도들은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면서 전쟁의 ’전‘자도 꺼내지 못하게 해놓고는 ’테러리스트‘가 되라니 도대체 무슨 말이야. 위험하다, 위험해.’
학생들의 머리에서는 경적이 빨간빛을 발하면서 ‘삐융삐융’ 시끄러운 경고음을 내기 시작한다. 선생의 권위에 눌려 속내를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학생들의 복잡하고 불안한 심경이 한순간에 감지된다. “기성의 가치 관념과 지식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이 곧 아나키즘이고,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는 자가 곧 아나키스트”라는 식의 부연 설명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학생들은 선생이 하려는 말을 이해하고, 안심한다.
학생들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나키즘=테러리즘’, ‘아니키스트=테러리스트’,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아니키스트=무정부주의자 혹은 체제전복주의자’의 등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과연 아나키즘은 위험한 사상이고, 아나키스트는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전복시키려는 자들인가? 아나키와 아나키즘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이유이다.
“국가는 테러리즘을 증오하지만, 혁명보다는 테러리즘을 선호한다.”
1974년에 나온 클로드 샤브롤(Claude Chabrol)의 스릴러 영화 <나다(NADA)>에서 주인공 디아즈가 한 말이다. 혁명은 국가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지만, 테러리즘은 오히려 국가권력을 정당화하고, 강화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상이나 이념 또는 종교는 이상향(유토피아)을 추구한다. 만일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가득 찬 바다(즉, 고해 苦海)와 같은 현실에서 이상향을 제거해버린다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삶을 포기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유토피아가 들어있지 않은 세계지도는 들여다볼 가치가 없다.”
아나키즘도 하나의 사상이지만, 다분히 ‘이상향’을 꿈꾼다. 문제는, 다른 사상과는 달리 아나키즘은 ‘모든 권력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권력’은 ‘국가’를 구성하고 작동시키는 핵심이자 결정체다. 만일 ‘국가’에서 ‘권력’을 소거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고,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주권’에 기반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다. 그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논의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물론 아나키즘은 ‘국가’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국가는 권력의 행사 없이는 작동할 수 없다. 그 권력을 반대하고 부정하는 아나키즘과 국가는 늘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통치권자나 정치권력자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가(≒권력)는 그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인 것이다. 하지만 모든 권력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아나키즘은 하나의 정치운동이나 철학 또는 예술적 감각의 측면에서 정의될 수 없다. 아나키즘은 그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이다.”(숀 쉬한, 15쪽.)
“아나키즘은 현실을 파악하는 방식이자 삶의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나키즘이 통속적 의미에서 정치라는 경계를 넘어선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장 프레포지에, 19쪽.)는 점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국가권력과 아나키즘은 태생적으로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국가권력은 그 속성상 통치와 지배에 순응하는 국민을 원한다. 하지만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국가권력을 반대하고, 불복종한다. 아나키즘이 갖는 이 성질에 대해 오스카 와일드는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불복종은 인간의 원초적 덕목이다. 진보가 이뤄져 온 것은 바로 불복종을 통해서다. 그렇다. 불복종과 반란을 통해서다.”
아나키즘이 왜 이다지도 국가권력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고, 대립각을 세우는가? 아나키즘의 어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아나키(anarchy)‘는 ‘시원, 근원, 통치 혹은 지배’을 뜻하는 그리스어 ἀρχός(arkhos)에서 유래한다. 이 말에 “~이 아니다, 혹은 ~이 없다(not, without)”는 것을 뜻하는 부정접두사 ἀν(an)가 결합하여 ‘아나키’가 만들어졌다. ‘아나키’란 본래 “통치 혹은 지배가 없음”을 의미한다. 아나키즘(anarchism)은 ‘아나키’에 “사상이나 주의”를 나타내는 ‘이즘(-ism)'이 결합한 것이다.
이처럼 아나키즘은 처음에는 “통치 혹은 지배 없는 상태”를 의미했으나 그 후 ”통치자 혹은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아나키란 말이 현실정치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대혁명 이후 19세기 후반부터이다.(박홍규, 84쪽.)
‘아나키’가 ‘아나키즘’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어 정착한데에는 ‘아나키즘의 아버지’로 불리는 프랑스의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Pierre-Joseph Proudhon)의 역할 덕분이다. 1840년에 출간된 『소유란 무엇인가(Qu'est ce que la propriété?)』에서 프루동은 “나는 아나키스트”라며 스스로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명명하고,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다. 그리고『연방의 원리에 대하여(Du Principe fédératif)』(1875)에서 프루동은 ‘아나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다양한 자유체제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영어로 ‘자치정부’(self-government)로 불리는 체제를 아나키 혹은 개별정부로 지칭하고자 한다. 일련의 모순을 포함하고 있는 아나키한 정부(gouvernment anarchique)란 표현은 불가능하고, 또 이는 부조리한 이념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언어(용어)를 재구성하면, 정치적으로 아나키(anarchie)의 개념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또 긍정적이다.”(Pierre-Joseph Proudhon, p. 29.)
 |
|
“아나키의 개념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또 긍정적이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프루동은 아나키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하였다. “개인은 절대군주제의 극단적 반대로서 자기 자신의 독재자라고 할 수 있다.”는 그의 견해에서 알 수 있듯이 프루동에게 있어 아나키란 “주인이나 주권자가 부재한 통치형태”이다.
아나키에 대한 프루동의 견해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맑스는 『철학의 빈곤(La misère de la philosophie)』(1847)에서 프루동을 ‘유토피아적 비현실주의자’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프루동의 사상을 현실적으로 실천하는데 기여한 미하일 바쿠닌(Mikhail Bakunin)조차 아나키즘 대신 집산주의(collectivism)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처럼 아나키즘이라는 말은 1880년대부터 오늘날과 같은 뜻으로 정착되었지만(박홍규, 84쪽), 그 의미는 여러 가지로 사용되고 있다.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의 견해를 통해 아나키의 세 가지 의미를 살펴보자.
첫 번째 의미는, 무질서이다. 이 의미는 “어떤 사회나 조직 내의 계급이나 계층”을 의미하는 hierarchy의 반대 개념으로 주로 “질서가 없는(혹은 질서를 잃어버린) 상태”인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 흔히 아나키즘을 “중앙집권적 통일적인 정부기구가 없는 무정부상태”의 의미로 사용할 때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의미는, “권력이 없는(즉, 무권력)” 또는 “지배나 통치가 없는(즉, 무지배 혹은 무통치)”를 말한다. 아나키의 영어 단어인 “an+archy”의 원래 뜻에 가장 가까운 의미이다. ‘권력과 지배 혹은 통치의 부재’는 곧 ‘무정부 상태’를 의미한다고 이해한다면, 두 번째 의미는 아나키즘을 현실적으로 확산시키는데 가장 크게 기여를 했다. 하지만 ‘무권력, 무지배, 무통치’라는 의미를 가진 아나키즘은 현실 정치뿐 아니라 음악과 미술 등의 문화예술활동은 물론 새로운 사회조류와 현상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도 폭넓게 활용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나키즘은 “기존의 권위와 권력을 타도하고, 지배 관계로부터 벗어나 해방을 실현하는 자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 의미에 따르면, 아나키즘은 특정한 구체적인 대립 사건이나 어떤 정리된 이론을 가지지 않고도 성립할 수 있다. 또한 단순히 개인의 내면에 잠재된 가치관이나 의사에 따른 절대적인 자유를 지향하는 사상이나 운동까지 아나키즘의 의미 안에 포함시킬 수 있다. 이처럼 “무정부 상태=무권력, 무지배, 무통치(≒자유)”로 보는 경우, 부처와 예수를 비롯한 종교인은 물론 역사상 유명한 사상가와 예술가들도 아나키즘적인 성향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의미는, 무정부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로 번역․사용하는 것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의미에서 아나키즘은 ‘권력과 지배의 부재’보다는 ‘국가와 정부의 부재’에 초점을 둠으로써 두 번째 의미보다는 아나키즘을 상당히 좁은 의미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아나키즘=무정부주의’로 각인시키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 이 세 번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아나키즘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국가와 정부의 폐지’가 아니라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다. 이 입장에 선 아나키스트들은 전자를 통한 후자의 목표, 즉 ‘국가와 정부의 폐지를 통한 권력과 권위, 혹은 지배와 통치의 폐지’라는 목표를 이루고자 하였다. 다수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의미의 사상 및 운동을 전개하면서 무력이나 폭력 수단을 사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이 과정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다”라는 부정적 인식이 고착되었다. (http://ja.wikipedia.org/wiki/アナキズム)
아나키의 의미에 대한 위 세 가지 입장은 아나키즘의 본질과 그 유형을 이해를 하는 데 있어 아주 유용하다. 오늘날 첫 번째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의미가 중요하다. 특히 아나키의 의미에서 제시되고 있는 ‘권력과 권위, 지배와 통치’가 의미하는 바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시각은 근대에 형성된 ‘국민주권국가’가 오늘날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결적으로 분석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
|
<참고문헌>
•숀 쉬한(조준상 옮김),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 필맥, 2003.
•장 프레포지에(이소희․이지선․김지은 옮김), 『아나키즘의 역사』, 이룸, 2003.
•박홍규, 『자주․자유․자연’ 아나키즘 이야기』, 이학사, 2004.
•Pierre-Joseph Proudhon, Du Principe fédératif, 1875.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