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 (6)

<친밀한 적>, 익숙한 타자, 신자유주의
뉴스일자: 2013년06월07일 13시01분

입이 큰 배우 줄리아 로버츠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예쁜 아내로 나왔던 영화 ‘적과의 동침’에서 ‘적’은 타인 앞에선 자상하고 한없이 좋은 남편이지만, 아내 앞에서 악마처럼 돌변하는 남편이었다. 싸움의 지침에도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적은 항상 내부에 있으니 경계하라. 너무 익숙하게 일상적으로 친밀했던 적이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하는 순간 적은  문득 낯선 타인으로 새롭게 인식된다. 반복되는 생활에서 우리의 무의식이 빈번하게 억압되었다가 예기치 않은 실수나 농담, 꿈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말이다. 내 안에 익숙한 타자, 무의식은 어쩌면 타자에 의해 강요된 이데올로기는 아닐까.
 
 탈식민지 이론가 아쉬스 난디는 영국의 식민 지배가 인도인의 자아와 욕망을 변형시켰다는 의미로 영국을 ‘친밀한 적’으로 규정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몇 주 전에 읽은 책 <친밀한 적 / 김현미 외 5인 공저 / 이후>도 그 파괴력을 인식하기 전에 우리 일상의 문화로 자리 잡은 ‘신자유주의’를 ‘친밀한 적’으로 간주했다.

 처음 ‘신자유주의’란 용어를 접한 것은 2005년 <동화 읽는 어른> 모임에서 발행된 월간 회보에서였다.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선생님의 강의록이 실린 글에서 신자유주의를 읽었다. 막연하게 폭력적인 군사력을 앞세워 식민지를 개척했던 제국주의의 경제침탈이 훨씬 더 세련된 방법으로 변형 되었구나 정도로 생각했지만, 정체모를 불안이 파고드는 느낌은 떨칠 수 없었다.

 <친밀한 적>은 2008년 촛불집회의 흥분이 미국 발 ‘글로벌 연쇄 파산의 공포로 역적 되는 순간‘ 기획 되었던 연세대 사회학과 김현미 교수와 박사 과정 제자들의 연구 성과를 담은 책이다.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란 부제에 걸맞게 총 7장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이론과 문화 논리, 일상을 지배하는 금융자본, 이주 노동자 문제, 자기 관리로서 외무 가꾸기에 스며든 신자유주의, 감정 자본주의와 치유 문화, 생명 자본의 논리 등을 다뤘다. 다행히 이 책은 분석에만 그치는 학술논문이 아니라 ‘포스트신자유주의’를 꿈꾸는 대안적 방법도 제시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가 빠른 시간에 확산된 것은 무엇보다 ‘자유’의 개념이 변화했다는 것이다. ‘개인의 선택의 자유, 정부로부터 간섭 받지 않을 자유, 어떤 조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스스로 설정한 목표를 추구할 자유’는 쌍둥이처럼 붙여 다녔던 ‘평등’과 함께 하는 ‘(정치경제적) 자유’가 아니라 오로지 ‘개인’의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적) 자유’에 한정된 느낌이었다. 그러니 사회적 안정망은 부실해지고, 시장경제의 적극적인 행위자인 ‘재산’을 가진 ‘개인’은  더 많이 소유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일상적인 덕담으로 나눈다. 게다가 부에 대한 욕망은 예외 없이 개인의 ‘자본화’를  암묵적으로 강요한다. 개인은 끝없이 자신의 능력을 ‘스펙’이란 명목으로 향상시켜야하고, 주식투자, 부동산 같은 재테크에 무지하면 ‘루저’대열의 일순위이다.

또,‘다문화’란 이름으로 이주노동자를 품는 정부의 노력 이면에 자리한 노동자의 ‘자유로운 이주’를 대하는 자본의 이중성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이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은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므로 공식적으론 재산을 가진 이민자와 고급 인력에 한정된 이주민 정책을 실시한다. 그러나 자본의 이익을 위한 배후에선 이주 통행세를 받고, 이주노동자 브로커와 산업이 성장하면서 소위 ‘불법’ 이주노동자를 양산하고 있다. 이미 노동자의 이주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자본의 세계적 이동에 따른 노동의 전 지구적 배열에 따른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주노동자는 인격을 가진 ‘인간’이 아닌 노동유연화를 위한 ‘상품’으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는 ‘전쟁’도 상품화한다. 국가 안보는 당연히 ‘군대’가 책임진다는 통념을 무너뜨리고 민간군사기업이 세계 각지의 전쟁터를 종횡무진한다. 바야흐로 군인도 ‘자국 군인’이 아닌  자유로이 국경을 넘어 기업과 개인의 이윤 창출을 위해 움직이는 ‘초국가적 노동력’이 된 것이다. 그러니 TV 광고의 ‘세콤’이 예사롭지 않다. 개인의 안전도 ‘경찰’같은 공권력이 더 이상 지켜주지 못하니 온전히‘개인’의 몫인 것이다. 더구나 민간군사기업은 국민의 안전을 위해 전쟁터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안보’를 위해 파업 현장에도 출현한다.

심지어 ‘힐링’과 ‘치료’라는 이름으로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신자유주의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개인을 각종 병명으로 진단하여 병자화(病者化) 한다. 자기 계발의 의지를 통해 작동하는 권력인 ‘신자유주의 주체성’은 경쟁 논리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도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 시킨다. 교육 현장에서 일어나는 왕따와 학교 폭력, 자살은 개인의 심리적 역량을 강화하면 해결된다는 식이다.

독립적인 자아와 사회적 성공을 목표로 하는 페미니즘 여성의 이미지를 상품화하고, 외모도 자산으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는 무엇보다 여성이다. 특히 불치병 치료, 질병 예방, 생명 연장 등 인간의 기본 욕망을 기반으로 하는 생명 공학을 통해 이윤을 창출하는 ‘생명 자본’은 과학 발전과 국가 이익을 내새워 여성의 몸을 난도질한다. 대표적인 여성 난자 매매는 ‘인체의 분절적 상품화, 윤리의 상대성, 전문적 생명 공학 기술로부터 인간(여성) 소외’ 등이 드러나는 현장이다.

몇 해 전 전국의 여성을 설레게 했던 드라마 대사 “내 안에 너 있다”는 다르게 해석하면 ‘내 안의 타자’에 대한 선언이다. 여기서 ‘타자’는 내 눈 앞에 있는 ‘그대’ 일수도 있고 우리의 내면을 지배하는 구조의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다. 마치 신자유주의 이념이 우
리 삶에 깊숙이 침투해서 익숙한 ‘타자’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생존 조건은 다른 사람과 공존해온 삶의 방식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란 타자는 우리의 생존 방식에서 ‘나 아닌 타자’를 배제하라는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 <친밀한 적>의 마지막 장에서 저자들은 대안으로 ‘기본소득 보장제도’와‘누진 소비세’와 같은 세금정책으로 대표되는 국가 공공 정책을 제시하고, 새로운 가치를 향한 연대를 주창한다. 사실‘새로운 가치’는 이미 오래된 ‘낡은 가치’인 ‘다른 사람과 공존하기’이다. 그것은 너무 익숙해서 ‘내 안의 너’가 되어버린 신자유주의를 낯설게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로 ‘내 안에 너 있다’를 ‘발견’하는 것은 가슴 뛰는 사랑의 고백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한 저항의 단초이며, 비판적 사유와 상상력의 지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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