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포차] 코오롱 해고투쟁 3000일의 역사

최일배 코오롱 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장을 만나다
뉴스일자: 2013년05월14일 23시02분

정리해고 3,000일. 2005년 2월 ㈜코오롱이 노동자 78명을 정리해고한 후 흘러간 시간이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의 크레인 농성과 쌍용자동차 노동자의 끈질긴 싸움으로 정리해고 문제는 사회적 이슈가 됐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인식은 확산됐지만, 9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기 때문일까. 코오롱 정리해고 문제는 한동안 잊힌 듯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코오롱 본사 앞에 천막 농성을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되는 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던 탓일까.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내걸고 싸우는 사업장이 너무나 많아서일까. 지난 10일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서 열린 코오롱 3,000일 투쟁 승리 결의대회에는 200여 명이 조금 넘는 인원이 모였다. 3,000일이라는 상징적 날짜에 비해 많은 인원이 모인 것은 아니었으나, 긴 시간 싸워온 코오롱정리해고분쇄투쟁위원회(코오롱정투위) 노동자들은 결기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예정된 결의대회의 마지막 차례. 코오롱정투위 최일배 위원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집회 내내 환하게 웃음 짓던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비장함을 토해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대화시도를 해봤습니다. 공문을 보내는 등 저들이 말하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대화를 요구했지만, 다 묵살됐다. 이미 언론보도 등을 통해 사실로 드러난 일(코오롱의 행동)을 현수막 문에 썼다. 그런데 저들이 가처분 신청해서 몇 천만 원의 벌금을 물게 생겼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들은 돈으로 우리를 죽이려 합니다. 돈으로 기를 죽이려 합니다. 또, 묻지마 연행으로 우리의 사기를 떨어뜨리려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가진 돈이 없으니 벌금이 두려워서 벌금 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연행되는 것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결사투쟁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언제부턴가 저들이 쳐 놓은 저지선을 넘지 못한다. 폴리스라인을 치면 주저한다. 넘지 말라는 것, 하지 말라는 것 멈칫하고 주저한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한다”

▲2013년 5월 10일, 정리해고 3000일 투쟁 승리 결의대회에서 발언하고 있는 최일배 코오롱정투위 위원장
▲코오롱정투위는 코오롱 본사에 면담을 요구하며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에 가로막혔다.

최일배 위원장과 정투위 조합원, 집회 참석자들은 코오롱 본사 후문을 향했다. 후문 셔터를 뜯어내 문을 열고 진입을 시도했으나, 그곳은 이미 참가자들보다 많은 수의 경찰이 막고 있었다. 3,000일 동안 묵묵부답이었던 코오롱을 향한 해고 노동자들의 분노는 그렇게 막혔다.

지겨운 반복, '경영상의 이유'...긴 싸움의 시작, 그리고 3,000일

3,000일 하루 전인 9일 과천 천막 농성장을 찾았다. 2006년께 코오롱 정리해고 노동자들의 싸움을 귀동냥으로 듣긴 했었지만, 아직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접한 것은 작년 말이었다. 3,000일의 시간은 이 싸움을 기록해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게 했다. 정리해고의 과정과 이후 투쟁 경과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3,000일의 시간은 느린 무궁화호 열차의 속도만큼 숨이 막혔다.

열차를 갈아타고, 과천정부종합청사 지하철역 6번 출구를 빠져나오자 천막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우뚝 선 코오롱빌딩 앞, 작지만 단단하게 버티고 선 천막에선 희미한 불빛이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최일배 위원장과 김해란 정투위 조합원이 거기 있었다.
 

▲5월 9일 늦은밤 비내리는 과천 코오롱 본사 앞 코오롱정투위 농성장

3,000일간 투쟁을 기록하고 싶다는 투박한 요청에 “좋지요”라며 흔쾌히 답했던 최일배 위원장과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코오롱 정리해고 2005년 2월 17일에 일어났다. 정리해고의 단골손님, 경영상의 이유가 근거였다. 당시 코오롱은 노조에 509명을 인원조정 대상으로 요구했다. 418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고, 임금 15% 삭감과 추가 희망퇴직자 91명을 받는다는 내용으로 노사합의안이 도출됐다. 정리해고는 없다는 전제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는 희망퇴직자 91명이 충족되지 않자, 78명을 정리해고 했다.

경영상의 이유라고 했지만, 코오롱 구미 공장 희망퇴직자 431명 가운데 410명은 비정규직으로 같은 자리에서 일을 시작했다. 또, 정리해고자 78명 가운데 80% 이상은 전․현직 노동조합 간부 출신이었다. 최근 논란이 된 노조파괴 문제는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었다. 노조가 많은 부분 회사의 요구를 수용한 상태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최 위원장도 “정리해고를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430명이 희망퇴직했고, 임금삭감 했고, 노조는 박살 난 상황에서 굳이 정리해고하지 않아도 회사에 대항할 사람이 없는데 하겠느냐, 그런 상황에서 정리해고하면 회사가 오히려 마이너스일 것이라고 여겼다. (정리해고 전) 조합원들에게 질문을 받았을 때도 99% 안 한다고 대답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럼에도 정리해고는 발표됐고, 78명의 정리해고자 가운데 50명은 싸움을 시작했다. 28명은 ‘힘들겠다’며 정리해고 발표와 함께 사직서를 던지고 떠났다. 이때가 정투위 활동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회사에 찾아가 ‘사유가 뭐냐고’ 항의했다. 하지만 회사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위에서 지시한 일이다”, “우리는 모른다”는 말이었다. 정투위가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을 하자, 회사는 정리해고자 선정 기준을 준비했다. 근무태도, 재산, 부양가족, 업무능력평가 등이 포함됐다. 문제는 이 업무능력평가라는 기준이었다.

최 위원장은 “100점 만점에 업무능력평가 항목이 15점이었다. 그런데 이 항목은 부서 반장이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내용이다. 정리해고 대상 1등에서 78등까지 이 점수가 4점을 넘지 못했다. 그런데 79등부터는 12~14점에 분포해 있었다. 여기서 다 판가름났다”고 말했다. 이들 78명 중 54명은 노조 전․현직 간부였다. 최 위원장도 정리해고 당시 간부는 아니었지만, 7대 코오롱노동조합 부위원장을 역임했었다. 회사의 눈밖에 벗어날 일은 또 있었다.

그는 구조조정 이야기가 현장에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공장을 돌며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싸움을 하자는 유인물을 배포했다. ‘최일배’ 개인 명의로 낸 유인물이었다. 최 위원장은 “노조 간부는 아니었지만, 전직 노조 간부였던 사람이 구조조정 이야기에 움츠러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두번 유인물을 배포했다”며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서서히 불기시작한 정리해고 바람...회사의 노조 길들이기

코오롱의 정리해고는 갑자기 벌어진 일이었을까. 최일배 위원장은 다른 노동조합에 교육을 가면 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이렇게 싸웠습니다’ 이런 이야기 하지 않는다. 나름대로 역사와 전통이 있다던 코오롱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박살 났는지, 반성과 속죄의 마음으로 이야기한다”

코오롱노조는 88년 설립해 97년 민주노총에 가입한다. 92년 스물다섯 나이에 코오롱에 입사한 최 위원장이 처음부터 노조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8년 동안 노조 사무실 근처에도 안 가봤다. 조합원은 그냥 조합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따라 하면 되는 정도로 생각했다. 사실 노동조합이 무섭기도 했다. 노조 간부들은 우락부락하고 거센 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다. 술도 못 마시고, 앞에 나서는 거 싫어했던 나는 노조 간부하고 멀다고 생각했다. 출퇴근 버스가 다니는 정거장에서 노조 사무실은 10m 거리에 있었음에도 한 번도 노조 사무실을 두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8년을 보냈다”는 말처럼 그는 노동조합과 거리가 멀었다.

99년 11월 7대 집행부 선거를 앞두고 위원장에 출마하려던 이가 찾아왔다. 조합 간부를 한 번 경험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에 출마해 당선까지 됐다. 함께 출마해 당선된 위원장은 그와 임원진에게 기본을 강조했다. 노조 간부는 조합원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그도 미친 듯이 노조 활동을 했다. 대의원도 해본 적 없는 그는 노조 활동이 신이 났다.  

최 위원장은 “처음 입사했을 때 3,000명 가까이 됐던 조합원이 조용하게 1,500명까지 줄었다. 회사가 설비가 낡은 부서는 소리소문없이 희망퇴직을 요구했고, 조합원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전까지 노조도 회사와 임금단체협상을 벌일 때 임금에만 초점을 맞춰왔다”며 코오롱에서 자연스레 진행된 구조조정에 대한 기억을 꺼냈다.

구조조정 문제가 점점 더 옥좨오자, 7대 집행부는 구조조정에 태클을 걸었다. 임금보다는 신규투자와 고용창출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현장의 반응은 싸늘했지만, 열심히 뛰어다녔다. 그는 “예전 집행부처럼 임금을 대폭 인상할 수 없으니까 고용창출 문제를 이야기한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낡은 공장에 신규투자를 하겠느냐는 이야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합원을 설득해 2000년 6월, 17일간 파업을 진행했다. 이때 회사로부터 “돈에 길들여진 조합원이 파업 할 수 있겠느냐. 7대 집행부 실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는 “파업대오가 70% 유지가 됐고,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임기가 끝나갈 무렵, 임원을 한 번 더 해야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당선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와 7대 집행부는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노조 활동이 권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때문. 아쉬움도 남았지만 잘한 일이라 여겼다.

8대 집행부가 들어서자 회사는 노조와 관계설정을 바꾼다. 최 위원장은 “8대 집행부 들어서자 회사가 알아서 잘해주는 거다. 퇴직금 중간 정산 규칙을 어겨도 회사가 받아줬다. 그러자 현장에서는 8대 집행부 능력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조합원들은 노조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 집행부가 알아서 다 해주니까”라며 회사의 노조 길들이기 시작점을 기억했다.

2004년 9대 집행부가 들어선 후에는 64일간 파업을 벌였다. 구조조정 압박 때문이었다. 최 위원장은 “이때 본격적으로 노조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회사가 유도한 파업이었다”고 지적했다. 64일간 파업에도 조합원을 회유하거나 협박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1,400여 명 조합원이 흔들림 없이 64일간 파업을 했는데도 회사를 이기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현장에 패배감이 형성됐다. 8월에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지만 11월 다시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왔다. 현장은 싸워봐야 회사를 이길 수 있겠느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는 말을 마치고, 최 위원장은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서서히 노조가 약화되고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10대 위원장 당선, 자본의 반격

2005년 6월, 정리해고 이후 정투위를 구성하고 노조와 함께 싸움을 논의하던 중 9대 집행부가 돌연 사퇴해 버렸다. 정리해고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다는 것. 이 일로 최 위원장과 정투위는 10대 집행부 선거에 출마한다. 회사가 지지한 한 팀, 어정쩡한 입장을 표하던 한 팀, 그리고 정투위. 세 팀이 격돌했다.

“당선될 거라고는 1%도 생각하지 않았다. 정리해고 투쟁을 위해 출마한다는 생각이었다”는 최 위원장의 말처럼 얼어붙은 현장에서 당선을 생각지 않았다. 정리해고 이후 회사가 해고자들에 대한 출입 가처분 신청을 냈고, 법원이 바로 이를 승인해 현장 출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출마해서라도 현장에 들어가자는 생각뿐 이었다.

“처음 3일은 노조 사무실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노동부에 노조 선거운동을 못하게 하는 것은 부당노동행위라고 항의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노동부가 회사를 찾아가 부탁했다고 하더라. 기껏해야 7일이고, 들어가 봐야 당선되겠느냐며. 그래서 회사가 4일째부터 인심 쓰는 척 용역직원들이 출입통제를 풀더라”는 최 위원장의 말처럼 회사도 이들의 당선을 예상치 못했다.

3조 3교대인 코오롱 공장의 특성상 출퇴근 시간 틈을 활용해 선거운동을 벌였다. 최 위원장은 당시를 언급하며 “430명 희망퇴직하고 임금도 삭감했는데 이건 너무하다. 정투위 50명, 노조 간부들 합하면 100명 정도다. 100명만 선봉대로서 최전방에서 싸우면 자신있다. 찍어만 달라. 그 이야기만 했다. 다른 공약은 필요치 않았다”고 말했다.

정규직으로 일하던 사람이 퇴직하고 비정규직으로 다시 입사해 같은 자리에서 일하게 된 상황. 현장의 울분은 정투위 쪽으로 마음을 돌렸다. 결국, 1차 투표에서 2등을 차지해 결선투표에 오른 끝에 과반의 6표 넘긴 득표율로 당선됐다.

10대 임원선거 당선으로 정투위 해고자들의 현장복귀는 눈앞에 다가온 듯 보였다. 하지만 9년의 투쟁을 예고라도 한 것처럼 첫 번째 난관에 봉착한다. 결선투표함에서 2004년 진행한 쟁의행위 찬반투표 용지 4표가 나온 것. 선관위는 쟁의행위투표 용지와 임원선거 투표용지는 엄연히 다르고, 과반에 6표를 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결정했다. 당선 확정 공고도 냈다.

그러나 회사는 이를 빌미로 10대 집행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최 위원장은 “회사가 이를 가만 보고 있지 않았다. 선관위원장을 만나 투표함에서 (쟁의행위투표)용지가 6표 나왔다며 선거무효 공고문을 써왔다. 당시 금전적으로 어렵던 선관위원장의 금전문제를 해결해 주고, 룸싸롱에 데려가 술 먹이면서 싸인을 종용했다. 선관위원장은 회사의 회유에 넘어갔고, 무효 공고문을 냈다. 선관위원장 직인도 노조에 반납한 후였기 때문에 싸인으로 공고문을 냈다”며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때부터 회사와의 지리한 싸움은 시작됐다. 한 선관위원이 양심고백을 하면서 상황이 바뀌는가 싶다가도 매스컴은 잠시 반짝하다 이내 잊혔다. 최 위원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노조 선거 당선은 법적으로도 문제가 없었는데, 회사가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싸움을 강하게 하지 못했다. 그게 너무 아쉽다. 위원장 이취임식도 공장 안에서 조합원이 보는 앞에서 하지 못하고 공장 정문 앞에서 했다. 또, 정투위뿐만아니라 980여 조합원의 위원장이라는 생각 때문에 교섭요청 등의 방식을 벌이며 시간이 흘렀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지방노동위에서 정리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이 났다. 중앙노동위 판결을 앞두고 정투위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2006년, 최일배 위원장은 단식투쟁을 벌였고, 3명의 조합원은 공장 내 철탑농성을 벌였다. 철탑농성이 30일 흘렀지만, 회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초조함이 생겼다. 그해 3월 코오롱 본관 로비 점거 농성도 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에 끌려나왔고, 이웅렬 코오롱 회장을 만나야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그와 정투위 조합원 10명은 새벽 5시께 서울 성북동 이웅렬 회장 자택에 들어간다. 2시간가량 면담을 요청했으나, 얼굴도 보지 못했다. 결국, 경찰의 연행이 시작되자 그는 동맥을 자르는 자해시도를 하게 됐다. 그 일로 옥살이를 하게 됐고, 노조위원장 자격도 상실한다.

▲2006년 3월 14일 코오롱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코오롱정투위는 코오롱 본사 로비에 점거 농성에 들어갔다. 하지만 4일 후 경찰의 연행은 시작됐고, 최일배 위원장은 연행에 항의하며 자해를 시도했다. [출처: 참세상 자료사진]

그해 9월 최일배 위원장은 출소해 정투위 위원장이 됐다. 마지막이라는 심경으로 2007년 4월 코오롱 50주년 행사에 맞춰 정문 앞에서 집중 투쟁을 계획한다. 그러나 확대간부 이상 집중하라는 민주노총 지침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400여 명이 모여 집회하는 것으로 마쳤다. 정투위 내에서도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코오롱 50주년 투쟁에서 힘이 빠진 정투위는 토론을 진행했다. 과반수가 “억울해서 그만 못 둔다”며 투쟁을 이어나갈 것을 결정했다. 하지만 “충분히 했으니 이제 그만하자”는 이들도 있었다. 2005년부터 2년 동안 지속된 싸움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생계도 걱정이었다. 그때부터 생계팀과 투쟁팀을 나누어 활동했다. 미안하다며 하나둘 정투위 활동을 그만두는 이들도 생겼다. 16명이 남아있던 조합원은 얼마 전 생계를 위해 대리운전을 하던 故 장고훈 조합원이 세상을 떠나 이제 15명이 남았다. 현재 투쟁팀은 최일배 위원장과 김해란 조합원 2명이다.

“9년의 싸움, 승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그러나”

과천 코오롱 본사 앞에 올라올 때 심경은 어땠을까. 이미 8년의 싸움을 벌인 후였다.

최 위원장은 “구미에서 일주일에 한 번 올라와서 선전전하고 다시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힘이 빠지는 감이 있었다. 그러다가 작년(2012년)에 투쟁사업장 공동투쟁단에서 함께 희망뚜벅이, 희망광장에 참여했다. 투쟁하는 동지들과 함께 싸우니까 너무 좋더라. 쌍용차지부에서 대한문에 농성장을 차리며 정리해고를 사회적 이슈로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코오롱투쟁의 키를 쥐고 있는 코오롱 본사에 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올라왔다”며 공동투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그는 “대한문 농성장을 내 투쟁처럼 아낄 수밖에 없다. 쌍용차 투쟁에 연대하면서 역설적이게도 코오롱 문제도 더 알려졌다”며 “투쟁하면서 정리해고 제도가 얼마나 나쁜 제도인지 알게 됐다. 회사가 정말 어려워서 하는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냐는 인식이 있었지만, 쌍용차 동지들의 투쟁을 통해서 정리해고에 대한 인식이 바뀌는 걸 느낀다”며 힘주어 말했

과천에서 1년간 농성을 하면서 시민들의 태도 변화도 직접 느꼈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이 SNS를 통해 물품을 보내온다든가, 지나가는 과천 시민들이 고생 많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다.

애초 2012년까지 계획했던 천막농성이 길어져 지치진 않을까. 그는 연대집회에서 종종 “우리는 복직 가능성이 1%가 안 됩니다”라는 말을 한다. 주변에서 말리기도 했다. 9년이라는 시간 때문일까. 그가 던진 말에서 이 말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흔히 우리가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는 승리가 아닌 방법으로 끝이 난다면 질긴 놈이 왜 승리하지 못 했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가보지 않는 길은 막막한 두려움이 있지만, 가봤던 길은 좀 더 찾기 쉬울 것이라고. 코오롱 9년 투쟁 속에서 왜 싸움이 그렇게 끝날 수밖에 없었는지, 분석하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우리의 투쟁은 의미가 있지 않겠느냐. 내가 잘난 것도 아니고, 코오롱정투위가 있었기 때문에 나도 싸울 수 있다. 기대처럼 코오롱이 정말 전원 원직복직 시키지 않을 수도 있다. 주변에서 어떻게 보느냐보다, 정투위 16명이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하다. 또, 정리해고가 나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알려내는 것이 중요하다”

이어 그는 “투쟁을 좀 더 강하게 했었더라면, KEC가 공장에 용역을 투입하는 등 노조파괴까지 할 수 있었겠느냐. 미안함에 공장 점거할 때 1%도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가 징글징글하게 치열하게 투쟁을 이어갔더라면... 자본이 어설프게 정리해고하면 안 되겠구나 했을 텐데...”라며 코오롱 구미공장 맞은편의 금속노조 KEC지회에 미안한 감정을 내보였다. 그는 KEC 공장 점거 투쟁 때 참가해 구속 되기도 했다.

 
▲정리해고 3000일이던 5월 10일 오전, 비가 내리는 날에도 코오롱 본사 앞 선전전은 이어졌다.

정투위 활동을 하면서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서 좋았다던, 딸에게 더 살갑게 대할 수 있어서 좋았다던, 딸 자랑을 빠뜨리지 않는 ‘딸바보’이자 정투위가 있어 자신이 있다는 최일배 위원장과 5시간 동안 진행한 인터뷰는 마지막 술잔을 비우며 마무리됐다.

그와 정투위는 3,000일 이후에도 투쟁을 쉬지 않고 이어가고 있다. 묵묵부답인 코오롱에 맞서 코오롱스포츠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는 이 노동자들의 삶에 함박웃음 필 날은 언제쯤 올까. 정리해고라는 끔찍한 기억을 치유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하며 과천 농성장을 뒤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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