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계급>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을 탐색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는 계급론
뉴스일자: 2013년04월27일 00시51분

작년 총선 직후 가까운 사람들과 술자리에서 있었던 경험이다. 선거 얘기를 하다가 계급이라는 용어가 나왔는데 모든 사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들이 생각하기에 계급은 낡고 진부하고 폐기해야 할 개념이며, 아직도 계급 타령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계급이 폐기해야 할 정도로 낡은 개념일까?

서울 강남 3구. 소위 말하는 우리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동네의 각종 선거 투표율은 다른 동네에 비해 월등히 높다. 즉, 계급 투표를 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계급은 여전히 유효하고 중요한 개념이다. 아니,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부르주아들은 철저한 계급의식이 있지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계급의식은 많이 희석돼 있다. 부르주아들이 끊임없이 주류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노동자와 대중에게 자본주의체제를 찬양하게 만들고 포섭한 결과일 수도 있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부족도 한 요인이다.

그런 점에서 이재유의 <계급>은 계급론이 현재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 주는 책이다. 소득 수준에 따라 계층을 나누는 계층론은 각 계층이 어떤 동질적 속성을 지니는지,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왜 상류층이 하류층보다 소득이 더 높은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민중, 시민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계급론은 역사적으로 불평등의 성격이 어떻게 변해왔고, 불평등을 완화하거나 해체하려면 현재의 계급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계급의 역사, 마르크스와 베버의 계급 정의를 살펴보고 이후 논쟁의 흐름을 살펴보면서 계급론의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

계급은 한 사회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위로, 사회적 불평등, 불일치, 불균형의 문제를 연구할 수 있는 개념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존재했다. 원시 공동체 생산양식은 노동 도구가 원시적이고, 인간의 노동이 집단적 성격을 띠며 공동체 소유의 형태를 취하고 자연환경이 생산 방식과 형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생산물은 공평하게 분배하는 체제였다. 따라서 사회의 계급 분화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원시 경제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는 경제다. 즉, 구성원 모두를 충족시킬 수 있으므로 원시 사회야말로 풍요로운 사회라는 역설이 성립한다. 만약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이익을 챙기려 한다면 이는 공동체를 해체하자는 것이고, 공동체 해체는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생산량을 엄격히 제한했다. 이후 족외혼제도의 등장은 물물교환을 자극했고, 이는 더 많은 잉여생산물을 요구했다. 이에 따라 최초의 사회적 분업인 성별 분업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성별분업은 계급 사회 출현의 가능성을 잉태하였다.

계급사회는 공동 소유를 무너뜨리고 사적 소유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적 소유는 부유한 자들이 타인의 노동생산물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탐욕을 키웠고, 이는 전쟁을 낳고 그 과정에서 노예가 등장하였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노예제 소유 생산양식 사회는 인류 최초의 계급 사회였다. 노예의 노동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노동은 고통스럽고, 지배계급은 노예 봉기를 막기 위해 군대, 법, 감옥 등의 기구들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국가의 기원이다. 노예주와 노예의 관계는 점점 더 적대적이 되었고, 생산력은 정체되었다. 결국, 노예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봉건제 사회가 등장하였다.

노예제 사회 말기의 생산성 저하는 계약 노예 토지 점유자(콜로누스)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따라서 노예주들은 봉건 귀족이 됐고, 콜로누스들은 농노가 되면서 봉건제 사회가 등장하였다. 농노는 토지를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점유는 할 수 있었고, 인격적으로 영주에게 예속되었고, 생산수단은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주에 의한 농노 착취 강화로 도시로 탈출하는 농노는 증가하였고, 도시민들은 영주에 대항하면서 점차 자치권을 확보하자 봉건제는 자본주의 상품경제로 바뀌었다.

화폐는 스스로 가치를 증대시키지 못하지만 스스로 가치를 증대시키는 자본은 자신의 가치 이상을 창출하는 노동력을 생산과정에 투입했을 때 생겨난다. 노동시간은 노동자가 임금으로 받는 필요 노동 시간과 자본가의 이윤의 원천이 되는 잉여 노동 시간으로 나뉜다. 이때 잉여 노동 시간을 늘려서 잉여 가치를 가져가는 것을 ‘절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이라 하며 기계화를 바탕으로 노동생산성을 증가시켜서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을 ‘상대적 잉여 가치의 생산’이라 한다.

자본가들의 경쟁에 따라 상품은 단순가격의 평균인 120원에 팔린다. 이때 자본가 1이 가장 많은 이윤을 창출하는데, 그 요인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불변자본 증가-기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가변자본은 줄고 이윤율 역시 줄어든다. 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자본의 이윤 증대를 꾀한 결과이고 노동력은 감소한다. 노동력 감소는 생산량보다 소비가 부족하게 되므로 경제위기로 이어진다. 이렇듯 계급의 역사를 통해서 역사적으로 불평등의 성격이 어떻게 변해왔고, 현재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모습을 보여준다.

마르크스는 계급이란 생산수단을 소유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 형성된 집단으로서 적대 계급 간의 계급투쟁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고 본다. 또,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은 잉여가치를 직접 생산하면서도 자본가가 이를 소유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노예의 지위에 머물게 되는 것을 ‘소외’ 현상이라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계급론은 사회를 지나치게 단순화했고 사회, 문화, 인종 차이에 기초한 불평등 체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이에 베버는 계급, 지위, 정당의 개념으로 계급 생성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계급의 불평등을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불평등, 정치적 불평등으로 나누고 경제적 계급, 사회적 지위, 정치적 영향력에서 원인을 찾았다. 하지만 베버는 계급 구조 이면의 현실을 지나치게 낙관하는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 계급론은 노동자 자신을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 건설의 역사적 주체로 보는 자기의식이 어떻게 형성되는가가 핵심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심화하는 과정에서도 혁명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는 마르크스 계급론에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대안으로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 마르크스주의 자체 내의 비판, 그리고 계급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입장, 마지막으로 베버의 시각을 취하는 입장이 있다. 특히, 서구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신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그래서 루카치는 경제 영역에서 자본의 법칙에 따라서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필연적으로 새로운 사회로 넘어가지 않으며, 계급의식은 정신 영역에서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자본의 이데올로기인 물신주의, 배금주의에 따라 돈을 최고로 삼는 사물화 된 의식을 가진다. 이런 상태에서 계급의식은 지식인 또는 공산당에 의해 전수받아야 가능하다고 봤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은 지식인, 공산당 조직에 좌우되는 계급의식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점이 루카치의 한계이다.

그람시는 시민사회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시민사회의 동의를 얻어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고 봤다. 그런데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확산하는 영역이 시민사회고, 이데올로기 투쟁의 전선을 그람시는 진지전이라고 부른다. 진지전이란 중심화 된 권력 구조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설득을 통한 동의로 지지를 얻어나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노동자 계급이 다른 피지배 계층의 동의를 얻어내는 진지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그람시는 봤다. 이데올로기 투쟁의 역할은 지식인이 담당해야 한다고 봤다. 이때 유기적 지식인은 노동자 계급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계급 바깥에 있다. 이 지식인들이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심어주고 시민사회에 전파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루카치처럼 노동자 계급이 역사 발전 주체의 지위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다.

알튀세르는 정신을 주체로 육체를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육체, 정신노동의 분리를 당연시하는 자본주의의 산물로써 노동자 계급의 문제는 자본가 계급 이데올로기에 근거한 것으로 봤다. 그래서 이데올로기와 대립하는 과학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과학을 되살리는 작업이 이론적 실천이고, 정치적 실천이지만, 다른 서구 마르크스주의자와 같은 한계에 부딪힌다. 알튀세르에게 과학은 자본가 계급에 영향을 받지 않는 ‘개념 자체의 질서’와 구조에 토대를 두며 원료(이데올로기)-변형 노동-생산물(과학)이라는 구조를 가진다. 변형 노동 과정에서 원료를 가공, 생산물을 만드는 주체는 없다. 왜냐하면, 주체는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체 없는 과정으로서 변형 노동 과정은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과학이며 이론적 실천 과정이며 이데올로기를 과학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들뢰즈는 다수자와 소수자라는 새로운 계급 패러다임을 통해 이미 다수자가 되어 버린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을 비판하고 소수자 중심의 계급투쟁을 주장한다. 이때 다수자와 소수자는 단순히 숫자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권력과 자원을 얼마만큼 보유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수자는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권력을 행사하고, 소수자는 늘 새롭게 도전하고 변화와 창조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는 사람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소수자 계급을 정의하면 이렇다. 단순히 소외된 사람이 아니라 이 세계에 없는 것을 얻고자 하며 다수자의 손에 놓인 세계를 구해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소수자는 무엇이다’같이 자신들을 정의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운동은 최초에는 소수자 운동이었지만, 프롤레타리아 당을 가지면서 노동자가 피지배 계급의 저항 주체로 떠오르고, 노동자 자신들만이 유일한 진리가 되면서 다른 소수자들은 소외를 겪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계급투쟁보다 임금 투쟁을 더 많이 함으로써 다수자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자본주의를 변혁하지 못한 것을 노동자 계급 의식의 부족에서 원인을 찾는다. 개별 노동자, 노동조합은 자본가의 포위 공격이 있을 때 자멸하거나 투항할 수밖에 없다. 이에 맞서기 위해서는 노동자 대중 혼자가 아닌, 모두가 생존을 책임지게 해야 한다. 개별화된 노동자는 임금으로 필요한 물품을 사고 삶을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면, 자신의 노동이 자본가의 이익을 만들어내는 수단으로 되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 전자가 발전하고 전개될 때 계급투쟁이 발생한다. 이는 이중적인 면에서 나타나는 모순의 갈등과 투쟁이며, 인간다운 삶에 관한 책임을 적대적 관계에 있는 개별적 개인에게만 지우는 것이 아니라 연대와 우애, 협력 관계에 있는 사회적 개인이 되기 위한 투쟁이다. 이런 실천은 자신의 노동력을 자본가가 아닌 자기 자신의 삶을 위하여 소비하는 활동이다.

자본주의에서 자본가가 최대의 이익을 뽑아내려는 곳은 공장 안이고 노동자 계급이 자기 자신을 생산하는 곳은 공장 밖이다. 공장 안은 억압과 착취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계급의식이 형성될 수 없다. 하지만 공장 밖은 우애와 협력, 동의와 연대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소질과 관계의 풍요로움을 통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인간다운 삶을 실현할 수 있다. 즉 계급투쟁은 연대와 협력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계급이라는 개념을 낡고 폐기되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자세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현실인식의 부재를 넘어 자신의 주체적 삶을 포기하는 자세이다. 2007년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이번 세계 경제위기는 주체적 삶에 대한 포기를 강요하기도 하지만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이는 전적으로 계급이라는 사슬을 끊으려는 계급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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