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더글러스 러미스, 김종철 옮김, 녹색평론사, 2002.12.10 | | |
성장이데올로기는 국가이데올로기 장치를 통해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재생산되고 있다. 한쪽으로는 국가(민족)이데올로기, 한편으로는 반공이데올로기와 연결되어 있는 성장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생존을 위한 노동자의 파업도, 생태보존을 위한 환경운동 등도 모두 불온시 되거나 무시될 뿐이다. 오로지 성장을 위한 경쟁에서 승리만이 강조되는 약육강식의 정글법칙만이 있을 뿐이다.
한국에서 성장신화는 박정희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흔히 박정희체제를 평가할 때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한다. 여기에는 성장 위에서만 분배, 복지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인식은 박정희체제 평가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로 올수록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하지만 성장과 착취, 수탈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지탱할 수 없기에 이런 발상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어떤 세력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정확히 보자면 누군가의 성장과 발전은 다른 누군가의 답보, 지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절대적 빈곤은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9백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해소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재벌을 비롯한 사회기득권세력들은 성장이데올로기를 통해 착취를 철저히 위장하고 이익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적 신자유주의의 위기 속에서도 주류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서 굳건한 토대 역할을 하는 성장신화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약육강식의 정글사회,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더들러스 러미스의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는 성장이데올로기의 허구를 명확하게 파헤치고 있다.
겅제성장 이외에도 이 책은 민주주의, 평화, 지속가능한 문명, 미국의 패권주의 등등의 테마들을 다루고 있다. 러미스는 현재까지 세계는 비상식, 비현실주의, 이상주의라고 여겨져 왔던 것들이 상식으로 대전환을 하기 바로 직전 단계라고 여긴다. 그래서 책 제목도 원래는 <21세기의 커먼센스를 위해서>라고 지을 생각이었다. 타이타닉호가 계속 전진을 한다면 빙산에 부딪치는데 여기서 타이타닉호가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상식이다. 하지만 계속 전진을 한다면 빙산에 부딪치기에 멈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비현실주의자로 낙인찍힌다. 타이타닉 비유를 통해서 그는 지금까지의 상식, 고정관념의 모순을 밝히고 비현실주의가 진정한 현실주의라는 것을 주장한다. 그럼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일본 헌법 9조는 ‘전쟁은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 영구히 방기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내에서는 현실적이지 못하고 실현불가능하기에 개헌을 하자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9조의 마지막 ‘국가의 교전권에 대해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자위권만 있지 교전권은 없다’라는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이 논리에서 교전권은 침략권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국제법상 침략권은 어떤 국가라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9조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도 같은 상황이다. 이렇듯 그는 일본 극우파의 개헌 책동을 국제법의 사례를 들어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라며 폭로하고 있다.
교전권은 사람을 죽이는 군대의 권리로서 국가 폭력중 하나다. 막스 베버에 따르면 국가는 정당한 폭력을 독점하는 유일한 조직이다. 국가 폭력은 경찰권, 처벌권 그 다음이 교전권이다. 하지만 국가에 의한 폭력을 폭력으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국민을 지켜 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국가의 폭력권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20세기는 국가 폭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람이 인류역사상 최고이며 그것도 외적이 아니라 자국민 살해가 월등히 많다고 고발한다. 이는 제주도 43항쟁, 광주민주화운동 등 한국현대사를 통해서도 증명되고 있다.
경제발전은 이데올로기이고 1949년 미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보편화되었다. ‘develop’는 원래 ‘푼다, 꺼낸다’는 의미의 자동사이다. 즉 꽃망울이 꽃이 되고 씨앗이 나무가 되고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으로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변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나무가 재로, 점토가 도자기로, 숲이 주차장으로 변화하는 것은 발전이 아니며 구조에 따르는 변화가 발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트루먼은 미국이 전세계 미개발 국가를 발전시킨다는 타동사의 의미를 사용하고 있지만 미개발 국가 입장에선 그것이 발전이라는 자동사의 의미로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경제발전은 정교한 이데올로기장치이다. 트루먼에 의해 보편화 된 배경에는 직접적 식민지배 방식의 전환, 2차 대전 후 미 경제의 세계 주도권 장악, 냉전에 따른 미소경쟁, 새로운 투자 장소의 필요가 있었다. 이런 배경에서 세금제도, 노동윤리 등등 그 사회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근본적으로 착취 불가능한 나라를 미개발 국가로 낙인찍어 착취를 착취가 아닌 개발로 포장하였다. 한마디로 서구경제제도 밖은 미개발, 야만으로 몰아 부치는 서구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의 전형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경제발전이데올로기는 제국주의시절 식민지 건설 단계에서 강제노동의 역사마저 지워버렸다. 비서구인들은 자급자족의 사회였기에 임금노동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제국주의자들은 세금을 부과하여 노동으로 내본다든지 숲을 파괴하여 플랜테이션 노동을 시키는 간접 강제노동을 시켰고 이는 제국주의에게는 막대한 이윤을 가져왔다. 하지만 발전경제학의 패러다임에서는 강제노동은 무시되고 비서구인들이 서구의 경제 방식을 스스로 선택한 것이 된다. 그리고 막대한 국가 자금이 투입되면서 발전경제학은 성장하였고 제3세계 유학생에게 발전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각국의 경제 엘리트를 양성하였다. 이런 점에서 각 지역의 고유한 문화 파괴, 전통 기술 폐지, 언어 사멸이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경제발전이데올로기의 허구는 고층빌딩과 슬럼가 비교를 통해서 더욱 명확해진다. 슬럼은 첨단 건축 재료를 사용하고 근대이전에 존재하지 않는 근대의 산물이다. 슬럼가 사람들은 고층빌딩 청소부, 경비 등등으로 산업경제시스템에 결합되어 있는 철저한 착취와 피착취의 구조이다. 경제발전이 슬럼을 고층 빌딩화 한다는 것은 속임수이며 문화적으로 다양한 사회를 고층, 슬럼으로 이원화하는데 불과하다. 이런 빈부격차는 서구화를 통해 누구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통해 경제 발전의 합리화 더 나아가 빈곤의 합리화를 낳고 있다. 빈곤에는 전통적 빈곤(자급자족 사회), 절대 빈곤(아사), 상대적 빈곤, 근원적 독점에서 오는 빈곤(기술발달에 따른 신상품의 소유유무)이 있다. 결국 경제발전론은 전통적 빈곤을 상대적 빈곤, 근원적 독점에서 오는 빈곤화로 만들고 각 개인들을 막대한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자, 상품 소비자로 만들고 있다.
성장론자들은 ‘파이가 커지면 조각도 커진다’라는 논리로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논리로는 상대적 빈곤, 근원적 독점에서 오는 빈곤을 해결 할 수 없고 오히려 고착화 시킬 뿐이다. 흔히 성장론자들은 낙수효과를 주장하지만 러미스에 따르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빈곤의 문제는 정당한 분배라는 정치적 해결책으로 접근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 풍요의 개념을 바꾸며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경제 이외의 것에 가치를 둔 대항 발전과 참다운 의미의 행복을 주장한다. 결국 풍요의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자본주의에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근원적 독점으로 이어지고 이는 희소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희소성을 바탕으로 한 풍요는 결국 빈부격차의 다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어원상 국민이 주권(국가 의사 최종 결정권)을 가진 정체이지만 많은 사람이 무력감을 가지고 있다. 이는 국민이 제대로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선거에서 대표를 뽑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며 귀족제라고 했다. 즉 대의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의제가 민주주의로 개념이 바뀐 것은 19세기 초반이다. 아무튼 민주주의는 국민이 권력의 원천으로서 여러 역할이 있다. 노동자로서 양심에 반하지 않는 직업 선택의 자유, 직장 내 언론 자유 추진, 소비자로서 윤리적 소비, 대안 경제 활동, 정치의 역할로서 다양한 정치 활동과 여론 조성 마지막으로 문화의 역할로서 교환가치이외의 본래적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감성 등이다. 그리고 군대가 존재하는 한 민주주의 국가는 있을 수 없다. 또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가가 없다면 민주주의는 가능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이런 관점에서 생계유지를 위한 장시간 노동역시 민주주의의 걸림돌이 된다.
우리는 학교에서부터 간접민주주의 또는 대의제민주주의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다. 얼마나 잘못된 개념을 학창시절부터 주입받아 왔단 말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 고정관념이 현실주의라고 인정받는 이면에는 이렇듯 엉터리 개념과 모순이 가득차 있다. 물론 영토가 확대되었고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에 직접민주주의는 불가능 할 수 있다. 그러나 전국적 차원에서 직접민주주의가 불가능하더라도 제도적 차원에서 얼마든지 보완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미국의 로버트 폴 볼트는 ‘가정용 투표기’라는 즉석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제안을 하는데 주요 정책에 대한 토론과 투표(TV에 부착, 지문 인식을 통한 부정행위 방지)를 통해 선거 비용의 절약 및 정치적 관심의 증대, 책임의식 증대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아무튼 러미스는 이 책을 통해 지금까지의 상식, 고정관념의 모순을 밝히고 비현실주의가 진정한 현실주의로 전환되리라고 전망하고 있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