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정권 시절 민주와 반민주의 구도 이후 김대중, 노무현으로 표상되는 ‘비판적(개혁)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등장한 다음 노동과 민중의 삶을 짓밟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몰두한 뒤, 이명박 정권이 그 과업을 완수하기 위해 민중에 대한 억압을 강화하자, 시민단체는 물론 진보정당들까지도 또다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몰아갔다. 여기에는 정치와 경제를 외재적으로 분리하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의 이분법적 인식틀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박정희체제에 대해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나 독재를 했기에 비판받아야 하는 평가도 가능하다. 자유주의 세력은 독재를 문제시했지 자본을 비판하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투쟁한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민주주의가 미래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대중들의 투쟁에 장애로 기능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현실에서 800만 명이 넘는 비정규직과 100만 명이 넘는 청년실업자의 고통이 설 땅은 없다.
이 책은 이런 현실이 아직도 우리 역사와 민중이 박정희체제를 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왜 30년이 지난 박정희체제를 넘지 못했을까. 그 뿌리는 정치와 경제 혹은 통치체제와 민중의 삶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자유주의적 발상에 있다. 그래서 이 책은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체제를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비판을 비판하고 있다. 이 책은 1961년 5·16 쿠데타부터 유신체제의 종말까지 박정희체제를 토대와 상부구조의 변증법적인 통일을 견지하면서 제3공화국과 유신체제라는 상부구조가 자본의 축적제제, 따라서 노동자계급과 민중의 삶에 대한 수탈과 억압체제 그리고 그 필연으로서 민중의 투쟁과 지배계급의 대응 등을 매개로 어떻게 재구성되었는가를 분석하고 있다. 다음은 이 책의 주요 내용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다.
 |
▲이광일 저, 메이데이, 2011. 5. 16, 17000원 | | |
박정희 체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 자유주의적 이분법의 발상을 넘어서
박정희 체제에 대한 논쟁은 자유주의적 이분법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하지만 자유주의적 비판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박정희가 된다. 제대로 된 논쟁을 위해서는 박정희 체제의 시기 구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크게 유신 전과 후로 나뉜다. 그 근거는 3공화정이 유신체제보다 상대적으로 민주주의였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3공화국과 유신의 민주주의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분리론’과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경제와 독재 체제인 정치를 분리하는 발상이 있다. 하지만 민주적 박정희체제를 공개적 독재인 박정희체제가 부정하는 것이 가능한가? 경제성장이 반인권 억압의 정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전태일 분신, 동일방직 똥물사건, YH노동조합 사건은 분리론의 모순을 확인해 줄 뿐이다.
자유주의적 이분법에 따른 비판은 국가, 정치, 민주주의를 사회, 경제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혹은 중립자로 인식하고 있다. 즉 국가를 중립적 조정자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런 인식은 사회구성체 전체를 구성하는 제 관계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게 한다. 한편 국가와 시민사회는 상호 밀접하지만, 형태상으로는 분리되어 있다. 이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결코 해소될 수 없으며 시민사회에서 전개되는 정치들의 시민권은 체제에 순기능을 할 경우에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자유주의적 이분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민주주의와 적대적 자본의 지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유신체제의 등장과 몰락에 관한 논의들
박정희체제에 대한 등장 원인에 관한 연구의 중심은 ‘관료권위주의론’과 ‘과대성장국가론’이다. 먼저 관료권위주의론에서 유신의 등장은 국내수요를 목적으로 한 60년대 수입대체산업이 한계에 부딪히자 그 해결을 위해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주도형 산업화 전략으로의 전환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민군기술관료집단 중심의 국가, 국제자본, 국내 대자본의 연합이 수입대체산업에 근거한 기존의 민중연합을 억압, 통제하며 출현한 체제로 파악한다.
하지만 이 이론은 국가의 이해와 관련하여 몇 가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우선 국가가 단순한 국가운동의 차원을 넘어 자본의 심화를 매개할 만큼 자본주의적으로 발전하는 토대와 깊게 결합한 자본의 국가라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의 재생산을 위해 애초부터 그것에 내재하여 작동하는 국가 역할의 구조적 변화라는 역사적 맥락 위에 있음을 포착하는데 둔하며 이런 점에서 볼 때 관료권위주의화는 자본주의세계체제의 주변부에서 역사특수적으로 관철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관료권위주의론의 등장 원인을 내적 요인에만 맞추어 분석함으로써 과학기술혁명에 근거한 초국적 자본의 투자전략변화가 심화에 미친 규정력을 과소평가한다.
과대성장국가론은 탈식민지국가는 제국주의의 유산 탓에 아직 분화, 성장하지 못한 약체의 시민사회에 강한 통제 및 지배력을 행사하며 중심의 부르주아, 토착부르주아, 많은 경제적 잉여를 전유하며 그것을 관료 주도적 경제발전에 사용하는 자율성을 지닌 국가를 주요 세 계급으로 전제로 한다. 그에 따라 유신의 등장은 사회경제적 이해의 상충과 위기에서 연유한 것이라기보다는 통제력, 조정력, 정보수집 능력을 아울러 갖는 행정기구와 과대성장된 기존의 국가기구, 정부 최고수반이 자신의 임기연장을 둘러싼 위기의 대응 결과로 인식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성장 발전, 주도적 자본가계급의 형성 및 계급들의 긴장과 모순, 그에 따른 갈등과 대립이 국가의 성격, 위상의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현실을 해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실제 모습은 사회경제적, 정치적으로 분열된 상이한 세력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때, 국가가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 유지에 적합하다고 한다면 현실정합성이 없다.
박정희체제의 역사적 공과를 둘러싼 논의들
첫째, 박정희의 정치적 리더십을 찬양하는 평가이다. 박정희는 조국근대화와 민족중흥의 길로 결집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위해서 정치적 억압, 권위주의화는 불가피하다는 함의를 바탕으로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간 영웅주의 입장은 사회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인간의 분열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탈역사화된 소영웅주의적 입장을 보여준다. 이 관점에서 대중은 엘리트의 목적과 필요에 따라 동원되는 수동적인 객체일 뿐이며 박정희만이 능동적 행위자이며 역사의 주체이다. 따라서 난관에 직면했을 때 해결책은 제2의 박정희와 같은 탁월한 엘리트의 출현뿐이다. 하지만 이 관점은 영웅이 조성한 구조와 상황에 대해서는 문제시하지 않는다.
둘째, 경제발전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독재를 하였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탈과 억압은 사회의 물적 재생산 및 사회관계들의 재생산이라기보다는 외재적 권위주의 정치권력의 자의적인 권력남용 때문인 인권침해와 정경유착으로 이해한다. 즉, 억압적 사회구조들은 독재로 상징되는 잘못된 정치가 없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박정희체제의 정치적 억압은 직접적 생산과정 안의 비대칭적 관계들을 확대재생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모든 문제의 근원은 국가의 권위주의적 개입에 기인하므로 국가의 경제개입 배제 및 시장원리가 보장된다면 문제는 없어진다고 본다. 이후에 경제성장은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된다. 이런 맥락에서 1990년 3당 합당, 1997년 DJP연합은 결코 정치적 변질이 아닌 것이 된다.
셋째,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거래비용을 낮추고 무역과 시장 확대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국가에 의한 제도혁신의 결과이고 이 과정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연계 아래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선발자본주의국가 역시 산업화 초기에 권위주의적 개입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룬 다음 정치적 민주화를 전진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애초부터 권위주의적 정치형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런 지점에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왜 노동자, 농민 등 하층 생산자만 항상 그런 고통을 져야만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문제를 매개하지 않는 논의는 외견상 아무리 잘 설명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분법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민주주의의 급진화로
박정희체제를 평가할 때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경제적 성장을 이룬 업적은 부인할 수 없는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성장 위에서만 분배, 복지 등의 논의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함축되어 있다. 결국, 이런 논의 구도에서는 경제발전의 토대 위에서만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지배적 발상의 수용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이런 발상은 이데올로기이다. 왜냐하면, 성장과 착취, 수탈은 결코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에 대한 착취가 없다면 자본주의는 지탱될 수 없기에 이런 발상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어떤 세력의 이해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정확히 보자면 누군가의 성장과 발전은 다른 누군가의 답보, 지체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절대적 빈곤은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상대적으로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9백만 비정규직 노동자가 이런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더 핵심적인 문제는 절대적 빈곤이 해소되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대중에 대한 정치적 배제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에 의해 착취당하는가를 사회관계 및 권력관계의 역사특수적 양태를 밝히면 결국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문제시하는 것과 연결된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면 정치에 대한 사유는 불가능하고 정치 자체는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다.
그런데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섭’ 정치적으로 보면 ‘민주주의의 급진화’가 필요하다. 그동안 통섭을 막고 있는 장애는 갈등들 가운데 어떤 하나를 원인으로 나머지를 결과로 파악하고 이에 근거한 운동의 경로의존성 때문이다. 그래서 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론, 실천 작업의 불완전성에 주목하면서 경계를 허물고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급진화이다. 민주주의의 급진화는 정치와 경제, 국가와 사회의 구분 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구분이 관념적으로 가능한 것이지 실제 그렇지 않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각각의 사회관계에 근거한 이론, 실천 상의 조합주의를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박정희체제를 다루는 논의들이 그것의 비민주성, 반민주성을 다루면서도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다. 사실 박정희체제의 20년은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의 실패’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박정희체제 비판세력들의 한계를 냉정하고 깊이 있게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박정희체제 그것의 확대재생산으로서의 신자유주의경쟁국가가 강제하는 분절된 삶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들이 최소한의 역사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박정희체제에 대한 자유주의적 비판은 경제성장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의 착취를 바탕으로 한 자본의 성장은 이데올로기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성장이데올로기는 비정규직의 고통도 청년 실업의 고통도 파이를 키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유주의적 발상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