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10)

민란과 외적에 시달렸던 고려시대의 대구
뉴스일자: 2012년10월27일 05시04분

▲팔공산 비로봉과 동봉의 겨울

대구가 국가 전체의 핵심 지역이 될 뻔한 적이 있다. 신라가 통일을 완성한 직후인 689년(신문왕 9), 신문왕은 ‘서울’을 경주에서 대구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천도는 실현되지 못했고, 그 이후 대구는 줄곧 평범한 일개 지방으로 남았다.

고려 들어 대구는 신라 때보다도 더 못한 사정에 내몰렸다. 내내 민란(民亂)과 외침(外侵)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끝없는 어려움을 겪었다. 1193년(명종 23)에 김사미와 효심이 운문(청도)와 초전(성주)에서 일으킨 민란과 13세기 중엽인 고종 때 경상도까지 들이닥친 호란(胡亂)의 불더미 속에서 무수히 죽고 다쳤다. 1375년, 1382년, 1383년 세 차례에 걸쳐서는 왜구로부터도 살육과 노략질을 당했다.

1193년의 민란과 1202년의 난리 때 부인사와 동화사의 승려들이 반란군을 도와 관군과 싸웠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고려 제1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반란군 토벌을 기원하여 팔공산(公山) 산신[大王]에게 비는[祭] 글[文]― ‘제공산대왕문(祭公山大王文)’ 등을 지은 것은 대구가 반란군의 중심 지역이었음을 증언한다. 그만큼 대구사람들의 삶이 고단하고 피폐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1232년(고종 19) 제2차 몽고의 침략 때는 부인사의 초조대장경 판본이 불에 타 버렸다. 거란의 침략을 막으려는 호국 불교의 기원 아래 현종 초인 1011년부터 판을 짜기 시작하여 1078년 문종 때에 이르러서야 완성된 부인사의 초조대장경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보다 20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이지만, 몽고군의 방화와 침탈 앞에서 허망하게 전소하고 말았다. 세계적인 문화재가 외적의 침입에 불타버린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호국불교를 숭상하던 당대인들로서는 정신적 충격도 막심했을 것이다.

경상도 지역은 몽고의 제6차 침략 때 가장 큰 피해를 봤다. <고려사>를 인용한 <대구시사>에 따르면 ‘백성의 세(勢)가 궁하여 사자(死者)는 해골을 묻지 못하며, 생자(生者)는 노예가 되어 부자(父子)가 서로 의지하지 못하’였고, ‘산성과 해도(海島)에 들어간 자들을 출륙(出陸)케 할 때 공산성에 입보(入保)한 백성이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대구의 향기>도 5차 침입 때 팔공산 주봉의 ‘공산성으로 피난 갔다가 굶어죽은 백성들은 심히 많아서 늙은이와 어린이(의 시체)는 골을 메웠으며, 심지어는 아이를 나무에 매달아 두고 가는 자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팔공산

고려 초기, 왕건이 견훤과 일전을 겨루다가 대패하여 도주하면서 팔공산 염불암, 무태, 지묘동, 독좌암, 불로동, 반야월 등등과 앞산 일대에 남긴 ‘왕건의 길’을 제외하면 대구에는 고려 시대의 유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왕건이 전쟁에 지면서 남긴 흔적들을 보며 교훈을 얻기도 하는 것이 역사교육이다. 팔공산의 부인사도 바로 그런 ‘체험의 현장’이다. 

▲부인사 터

부인사에는 초조대장경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제 그 판본은 볼 수 없지만, 초조대장경이 외적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불에 타 없어진 그 참담한 역사만은 남아 있다. ‘없지만 있는’ 것을 가진 절로 부인사를 새롭게 바라보자.

우리는 부인사에 가서 없어진 것의 소중함을 깨닫는 정신, 소중한 것을 다시는 잃지 않겠다는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 없어졌다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우리 스스로 겨레의 역사유적과 문화유산을 찾지 않는다면, 누가 있어 면면히 내려져 오는 민족정기를 이어갈 것인가. 부인사에 초조대장경은 없지만, 그것을 만들어내었던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성은 여전히 팔공산 서봉 위를 맴돌고 있다. 

* 부인사는?

▲부인사 선덕묘

부인사는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절로 알려진다. 선덕여왕은 백제 의자왕에게 대야성(합천)을 빼앗기는 등 곤경에 빠지자 팔공산에서 불공을 드렸는데, 도인이 나타나 지금의 부인사 자리에 사찰을 건립하여 국난을 극복하고 통일대업을 완수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지금도 부인사에는 선덕여왕의 초상을 모셔놓고 제사를 드리는 선덕묘(廟, 숭모전)가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보름이면 선덕여왕 숭모 행사가 봉행 된다. 선덕여왕은 부인사에서 어머니 마야부인의 명복을 빌었고, 절 이름에 왕비를 뜻하는 ‘부인(夫人)’이 들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때 39동의 부속암자에 2천여 명의 승려가 수도하였던 신라의 거대 고찰 부인사, 그러나 호란 때 모두 불에 타버려 웅대한 역사성도 고색창연한 풍모도 모두 잃어버린 채, 현대판 작은 절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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