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정만진의 대구여행 (8)

대구에는 왜 국보가 없을까
뉴스일자: 2012년09월29일 02시11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면 우리나라에는 '국보'가 315호까지 있다. 제1호는 서울 숭례문이고, 제315호는 경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塔碑)다. 불에 타고 없는 숭례문은 여전히 국보 1호로 등재되어 있지만, 복원되어도 그저 서울시가 지정하는 등록문화재 정도에 불과할 터, 국보의 숫자는 314호로 줄어들 게 뻔하다. 물론 새로 지정되는 국보가 있으면 그 수는 늘어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대구에는 국보가 없다. 문화재청의 정의에 따르면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인데, 대구에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국가적 보물이 없다. 본디 대구땅에 있었는데 국립박물관 등 타지로 옮겨져 보관된 것도 단 하나뿐이다. 청동기 시대 대구 지역 최강의 세력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비산동에서 출토된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유물들이다.

▲비산동 출토 금동관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유물은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보러 서울까지 갈 사람은 대구만이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분야 연구자 몇 명을 제외하면 없을 터이니, 대구에는 국보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리라. (복제품은 대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대구에는 왜 국보가 없을까? 국보가 두드러지게 많이 있는 곳을 보면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국립경주박물관(경북 경주), 국립공주박물관(충남 공주),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의 불교중앙박물관(서울 종로구), 해인사(경남 합천), 리움미술관(서울 용산구) 등이다.

조선의 도읍이었던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천년의 변함없는 서울이었던 경주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불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불교중앙박물관과 해인사, 삼성의 리움박물관에 국보가 많이 있는 것은 그 까닭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부산은 대구보다 더 큰 도시이지만 국보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김해의 금관가야가 맹위를 떨치던 철기시대에도 부산은 그저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고, 아직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신석기 유물의 출토는 있었으나) 청동기 유물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넘쳐흐른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청동기 유물이 많은 대구에 비해 역사적 발전은 매우 늦었던 것이 분명하다. (1982년 대구직할시가 발간한 <대구의 향기>는 대구의 특징적 현상을 거론하면서 '청동기 유물이 많이 나온다'를 들고 있다.)

부산보다 역사 발전이 빠른 대구에, 왜 국보가 없을까. 대구에도 서울이나 공주처럼 국보가 무진장 존재할 뻔한 기회는 있었다. 바로 689년(신문왕 9)의 일이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에 따르면, 통일신라를 건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 신문왕 초기에 왕은 서울을 달구벌로 옮기려고[移都] 계획했으나[欲] 성사시키지 못했다[未果]. <삼국사기>는 신문왕이 천도를 앞두고 지금의 경산에도 행차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삼국사기의 달구벌 천도 기사 :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관련 기사 원문은 '幸獐山城 築西原京城 王欲移都達句伐 未果'이다. 장산성은 지금의 경산시, 달구벌은 대구 지역을 가리킨다. 한문은 (왕이 재위 9년 윤달 9월 26일에) 장산성으로 행(幸)차하였으며, 서원경성을 쌓[築]았고, 서울[都]을 달구벌로 옮[移]기려 했으나 성과(果)가 없었다[未]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의 천도 계획이 어떤 경과를 거쳐 어떻게 성사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신문왕이 지방을 순행한 곳은 대체로 문무왕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인 동해안 일대였다고 한다. 장산성 행차는 특별한 예외였던 것이다. 왕은 왜 동해안과는 정반대인 경산으로 행차하였을까. 그 행차에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을까.

▲대구읍성

<대구시사>는 신문왕이 달구벌 천도 계획을 앞두고 예비답사를 한 것으로 본다. 분지여서 별도의 나성(羅城, 내성인 왕궁 바깥을 에워싸는 외성)을 쌓지 않아도 산성을 활용하여 방어에 유리한 점과, 육로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로도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달구벌의 지리적 장점에 지목한 왕은 새 서울로 대구 지역을 지목하였지만, 경주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귀족 집단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국 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가 실현되었다면 지금 대구는 어떤 모습일까. 고구려의 평양 천도, 자의는 아니었지만, 백제의 부여, 공주 천도처럼 신라도 대구로 서울을 옮겼다면? 아마 대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선조 때 들어서야 경상감영이 설치되고, 영조 때에야 대구읍성이 축성되는 수준이 아닌, 그래서 국보 하나도 남기지 못한 차원이 아닌, 통일신라 초창기부터 국가의 수도로 번창하기 시작하였으면 대구는 과연 얼마나 활기차게 자라났을까. 골목골목 국보와 보물이 빛나는 문화도시, 정치와 경제의 국가적 중심도시로서 나라의 윤택함이 한곳에 모인 세계적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구미에서 출토되어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 중인 불상.

그러나 대구에는 지금, 국보가 없다. 경북 구미에서 출토된 불상 셋을 간신히 옮겨와 가까스로 '국립'이라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의 소장품을 제외한다면 정말 하나도 없다. 신문왕이여, 천도의 꿈을 이루셨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을, 어찌 미과(未果)하고 마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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