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날] 김성범의 동양철학 다시보기 (1)

삼강오륜? 오륜삼강? 날조된 삼강의 개념
뉴스일자: 2012년06월23일 00시59분

우선 저와 같은 시골 농부에게도 문을 열어 주시는 ‘뉴스민’과 독자님들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뉴스민’에 올리는 첫 글에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며칠 동안 고민했습니다. 수단의 힘에 맥없이 굴복해 버리는 현실에서 이에 맞서기보다 피하려고만 하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난감하기만 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오래 전 얼핏 접해보았던 동양사상에 대한 내용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정도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옛 것이라고 해서 무조건 추종하는 것도 올바르지 못한 태도일 것이고,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일 겁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가질 것은 가지는 것이 올바른 태도겠지요. <중용>(中庸)에 “분명하게 가려야 한다”(명변明辨)는 말의 의미 또한 이와 통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분명하게 가리기 위해서는 우선 “널리 배우고(박학博學), 자세히 살피고(심문審問), 신중하게 생각해 보는(신사愼思)”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릴 수 있는 단계까지는 앎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그러한 앎은 참된 앎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알았다면 “철저하게 실천”(독행篤行)해야지요. 그런데 박학도 감히 꿈꾸지 못할  사람이 이 일을 감당해 낼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성인이나 현인을 높여 받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들이 만약 백성을 억압하고, 그들의 재물을 빼앗아 잘입고 잘먹는 자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이념을 제시했다고 한다면 성인이나 현인이라는 칭송을 받지 못할 겁니다. 지금까지도 그들을 추앙하는 이들이 있는 이유는 그들이 어떤 형태로든 인류 보편의 가치를 천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인류 보편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규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행위는 명백한 악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정당화시키고 미화하려는 이론이나 사상을 제시한 사람은 성인이나 현인의 반열에 들 수 없을 겁니다. 예수나 석가, 무함마드, 짜라투스트라 등 어느 누구도 이러한 악을 칭송하지는 않았습니다.

주나라 말기에 오면 천하가 혼란스럽게 됩니다. 혼란스러우면 그 혼란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됩니다. 수많은 학자가 나오고 또 그들을 따르는 학파들이 형성되지요. 이른바 백가 쟁명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등이 당시의 저명한 학파들이었지요. 이들이 이루어 놓은 수많은 업적들 속에는 현재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것도 분명 있을 겁니다.

▲춘추전국시대

아시다시피 제자백가 가운데 가장 유명한 학파가 유가 학파이고, 그 대표자는 공자와 맹자입니다. 그런데 유가라고 하면 ‘삼강오륜’ 또는 ‘충’이나 ‘성’과 같은 개념들이 머리에 떠오를 겁니다. 아울러 유학은 이러한 이념을 가지고 대중들을 세뇌함으로써 봉건적 지배질서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만약 공자나 맹자가 오로지 지배계급의 이익을 위한 사상적 도구만을 만들어낸 인물들이라면 성인이나 현인의 반열에 오를 수 없었을 겁니다.

삼강과 오륜

삼강(三綱)은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군위신강君爲臣綱), 아버지는 아들의 벼리가 되고(부위자강父爲子綱),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된다.(부위부강夫爲婦綱)”는 의미입니다. ‘벼리’로 해석되는 강(綱)은 ‘그물을 당기는 줄’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물만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가 없지요. 그물을 당기는 줄이 있어야 합니다. 이 줄이 없다거나 혹은 느슨하거나 끊어지면 그물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상실합니다. 벼리가 있어야 그물을 당겨 조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으니까요. 벼리의 뜻이 가장 중요한 줄기, 강령 등의 의미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벼리의 역할 때문이겠지요. 나아가 벼리는 모든 인간 행위의 보편적 기준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은 그 자체로서 개인의 행위에 구속력을 가합니다. 법과 준법의 관계라고 할까요? 법 자신이 각 개인의 행위에 대해 직접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개인들의 행위는 법에 의해 규제 또는 구속되지요.

결국 삼강은 신하는 임금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절대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인륜을 어기는 패륜(悖倫)이 되고, 나아가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삼강이라는 게 곧 남성중심주의 및 가부장중심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는 겁니다. 신하, 아들, 아내는 오직 임금, 아버지, 남편의 명령에 따를 의무만 있을 뿐,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어떠한 권리도 없습니다.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인간을 노예라고 부르지요. 만약 공자나 맹자의 중심 사상이 이런 것이라면 역사 속에서 벌써 사멸 되었을 겁니다. 남아 있다고 해도 오직 사악한 도그마의 전형으로 간주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맹자> ‘등문공장구 상편’에 실려 있는 오륜은 어떨까요. 오륜은 부모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젊은이, 붕우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직접 겪은 일 한 가지 말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예전에 제법 총명하다는 학생들과 자리를 함께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오륜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부자유친’인가 ‘군신유의’인가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열에 아홉은 군신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더군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순서가 뭐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겁니다. 중요합니다. 그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삼강오륜

삼강, 군위신강이 먼저... 오륜, 부자유친이 먼저

삼강에는 군신관계가 맨 앞에 나옵니다. 그러나 오륜은 부자의 관계가 맨 앞에 나옵니다. 뜻을 한 번 새겨볼까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가 있어야 한다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는 부부유별(夫婦有別), 어른과 젊은이 사이에는 차례가 있어야 한다는 장유유서(長幼有序), 벗들 사이에는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붕우유신(朋友有信), 이 다섯가지가 맹자가 말한 오륜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삼강을 새길 때는 부자를 아버지와 아들이라 하고 오륜에서는 왜 부모와 자식이라고 했는가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삼강에 있어 양 항은 수직적 상하 관계입니다. 하지만 오륜에 있어 양 항은 수직적 상하관계뿐만 아니라 수평적인 관계도 있고, 수직적 관계라고 하더라도 쌍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같은 말이라도 새길 때에는 삼강과는 다른 관점을 적용해야 할 것 입니다.

‘친’(親)은 ‘어버이’, ‘가깝다’, ‘몸소’ 등의 의미를 가지지요. 여기서는 ‘몸소’의 뜻을 가지고 새겨야 할 겁니다. 그렇게 하면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한 몸과 같다는 의미가 되겠지요. 부모와 자식은 혈육에 의해 이루어진 관계입니다. 어떤 인위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그것을 끊을 수 없습니다. 맹자가 ‘친’을 쓴 데는 이러한 이유도 분명 들어 있을 겁니다.

‘의’(義)는 ‘옳다’는 뜻 외에 ‘인위적’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의형제를 맺는다고 할 때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따라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달리 필요에 의해 인위적으로 맺어진 관계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맹자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내지 못하면 언제든지 ‘민’(民)에 의해 교체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임금과 신하의 관계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別)은 ‘분별’이라는 뜻이지요. 부부사이에는 해야 할 일에 대한 분별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여성 억압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이는 ‘별’을 ‘차별’의 뜻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생긴 오해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생물학적인 측면에서부터 다릅니다. 바로 그 특수한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맹모삼천이라고 했지요. 맹자가 훌륭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여성입니다. 그런데도 맹자가 여성은 남성의 종속물 정도로 여겼을 것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곤란할 것 같습니다.

‘서’(序)는 위와 아래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현재를 있게 한 것은 기성세대이지요. 따라서 그들에 대한 존중은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위와 아래는 나이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으로서의 준칙, 즉 인륜을 범하는 자들까지 존경할 수는 없으니까요. ‘양혜왕 상편’에는 백성(民)이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를 혁명을 통해 몰아내는 광경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졌던 맹자가 나이를 가지고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말했을리 만무합니다.

‘신’(信)은 신뢰입니다. 벗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규정하고 있지요. 그런데 붕우를 반드시 가까운 지인에만 적용할 필요는 없을 것같습니다. 사회 구성원 전체의 관계로 확대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렇게 보면 맹자의 이 구절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맹자보다 앞선 공자도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신뢰 문제가 세상을 바르게 세우는 가장 핵심적인 요체가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논어> ‘안연’편에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의 요체에 대해서 묻습니다. 공자는 먹을 것을 풍족하게 마련해 주고, 군사력을 정예화하며, 백성들 사이에 믿음을 가지도록 해야한다고 대답합니다. 이에 대해 자공이 이렇게 묻지요. 세 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입니까. 공자는 즉각 군대라고 대답합니다. 안연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묻습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이겠냐고. 공자는 풍족한 양식을 포기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사이에 믿음(민신民信)이 없다면 나라가 하루도 버틸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놓고 보면 오륜은 삼강과는 이념적 기초가 다르다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나아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모순관계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삼강과 오륜이 공맹 유학의 핵심 이념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륜은 삼강에 대한 부연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지요. 순서상 삼강이 앞에 나오니까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이는 삼강과 오륜이 동일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앞에서 순서가 중요하다고 했지요. 맹자는 군신보다 부자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맨 앞에 넣은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맹자 이전부터 있어왔지요. <주역> ‘서괘전’에는 “하늘과 땅이 있고난 뒤에 만물이 존재할 수 있었고, 만물이 있고난 뒤에 남자와 여자가 있을 수 있었고, 남자와 여자가 있고난 뒤에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있을 수 있었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있고난 뒤에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있을 수 있었고, 부모와 자식이 있고난 뒤에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맹자보다 더 이전에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있고난 후에나 있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매긴다면 군신의 관계는 맨 마지막에 두었습니다.

삼강의 유래, 한나라 때 와서 확립... 오륜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잠시 삼강의 유래를 살펴보겠습니다. <논어>와 <맹자>에는 삼강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한(漢)나라에 와서야 비로소 삼강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반고가 지은 <백호통>에 ‘삼강육기’편이 있습니다. 거기에 “삼강은 무엇가?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부부이다.”(三綱者 何謂也 君臣父子夫婦也.)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정형화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의 일입니다. <예기> ‘악기편’에 “성인이 나와서 부자와 군신의 관계를 만드시고 이를 강기로 삼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공영달은 “삼강은 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는 아들의 벼리가 되고,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된다.”(三綱 謂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妻綱)고 주석을 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말하는 삼강은 공영달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후 하안이라는 학자는 <논어> ‘위정편’의 “주나라의 예법은 하나라의 예법을 따랐다.”(周禮因於夏禮)라는 글에 대해 자신 쓴 <논어집해>에서 마융의 말을 인용해 “따른 바의 것은 삼강오상이다.”(所因謂三綱五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오상은 곧 오륜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삼강이라는 개념은 한나라 때에 와서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륜은 맹자에 의해서 주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시대적으로 보나 유학 본연의 입장에서 보나 간에 삼강을 앞에 두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강은 공자나 맹자 어느 누구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삼강오륜에서 삼강은 제거하는 것이 옳겠지요.
 
하지만 이른바 주희로 대표되는 성리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유학의 형성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당나라 한유는 <맹상서에게 보내는 편지>(與孟尙書書)라는 글에서 “양주와 묵적의 무리들이 번갈아 천하를 어지럽게 해서 성현의 도가 밝혀지지 못했다. 그래서 삼강과 구법이 사라졌으며, 예악이 무너지고 이적이 멋대로 날뛰게 되었으니 어찌 금수가 되었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楊墨交亂而聖賢之道不明, 則三綱淪而九法斁, 禮樂崩而夷狄橫, 幾何其不爲禽獸也.)라고 했습니다.

한유는 ‘도통론’으로도 유명하지요. 그는 ‘원도’(原道)라는 글에서 유학의 도는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공자, 맹자로 이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맹자에 와서는 그 전함이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유학을 집대성하여 우리가 성리학이라고 하는 유학의 새로운 체계를 확립한 주희는 공자 다음에 증자와 자사를 넣고, 맹자 다음에는 자신의 스승인 이정 형제, 즉 정호와 정이를 넣은 새로운 도통론을 제시합니다. 주희 이후 성리학자라들은 주희의 도통설을 받아들이고, 자신들의 학문적 연원은 주희의 도를 계승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 개국초부터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음으로써 도통의 문제는 더욱 예민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도통론은 자신들이 속한 당파(黨派)의 이념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이용됩니다. 사문난적이니 파사현정 등도 진정한 공의의 실현을 위한 것이 아닐 수 있음을 엿볼 수 있지요. 우리가 삼강오륜이 공맹 유학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라고 믿게 된 것은 지금까지도 그것이 가지는 효용성을 필요로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날조된 삼강의 개념, 지배개급의 정치적 동기

다시 순서가 왜 중요한지 보겠습니다. 맹자는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가 부자의 관계라고 보았지요. 이 관계는 혈연적 관계로서 인위적으로는 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군신의 관계는 인위적인 관계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왕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백성에게 쫒겨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또한 맹자는 백성이 근본이라는 민본(民本)을 강조하면서, 백성의 뜻이 곧 하늘의 명령이고, 이를 위배하면 천명이 당장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린다고 했지요. 궁극적으로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하지 백성이 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군신의 관계를 앞에다 놓으면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 집니다. 군신의 관계도 부자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위적으로 맺어진 것이 아닌 필연적인 관계 라는 생각이 은연중에 자리잡게 되겠지요. 이러한 생각이 고착화되면 지배자가 아무리 횡포한 정치를 해도 자식이 부모를 부정할 수 없듯이 신하나 백성 또한 왕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겁니다. 한나라 때 와서 삼강이라는 개념이 날조된 것도 왕권의 강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대중들의 주체적 역량을 파괴함으로써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가 짙게 배여 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아울러 만약 삼강이 유학 본래의 이념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면 한유나 주희, 그 외에 도통을 중시하는 유학자들은 삼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낸 반고나 마융, 공영달, 하한과 같은 이들이 맹자에 와서 끊어진 유학의 정통을 잇게 되는 그런 계보를 만들었어야겠지요.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른바 학문이나 이론, 또는 이념이라는 것도 보편적 진리에 대한 추구보다 특정 집단, 그것도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소수의 집단이 자신들의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같습니다. 지금도 그런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몇 줄로 요약되는 보잘것없는 내용의 글을 쓸 데 없이 너무 길게 쓴 데 대해 미안한 마음 앞섭니다. 다음 주에는 맹자의 민본에 대해서 다뤄볼까 생각합니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