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빨간 주부의 부엌에서 보는 세상 (20)

너무 늦지 않게 바꾸자
뉴스일자: 2015년03월20일 09시50분

얼마 전 우연히 집어 든 책에서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경험을 했다. 모임에서 2015년 첫 토론 도서로 읽은 <생명의 강 / 샌드라 포스텔 외 1인 / 뿌리와 이파리>와 출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야금야금 읽은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 / 하승수 / 한티재>가 그것이다.

<생명의 강>은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시대부터 시작된 댐 개발로 인한 지속적인 생태계 파괴와 그 대안으로 1990년대 말부터 시작했던 하천 복원 사업의 실례를 자세히 소개했다. 특히, 이 책은 하천 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즉, 자연을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정량화와 표준화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서 탈피할 때 강의 생명 성이 되살아난다. 

2015년 현재 우리나라는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최대 업적으로 ‘4대강 사업’을 자화자찬하고 한쪽에선 4대강 사업의 폐해가 잇달아 고발되는 상황이다. 심각한 녹조 현상을 빗댄 ‘녹조라떼’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고, 보는 이에 따라 혐오스러운 외양과 부패 후 암모니아 배출로 수질을 오염시키는 ‘큰빗이끼벌레’가 이른바 정비된 4대강을 장악하고 있다. 생태계 교란이란 두루뭉술한 표현이 부족할 만큼 흐르지 못하는 강은 병들고 있다.

▲왼쪽 <생명의 강/샌드라 포스텔 외 1인/뿌리와이파리>과 오른쪽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하승수/한티재>

<생명의 강> 2장에는 우리 강을 복원하는 데 도움이 될 하천 관리 방식을 안내했다.  '드리프트 법(유량변화에 대한 하류의 반응)'과 ‘적응형 관리법’이 최근 방식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다. ‘드리프트 법’은 네 단계의 등급별로 생태계의 건강을 기술하고, 사회가 하천의 사용과 관리에 대해 내린 결정을 공개한다. ‘적응형 관리법’은 인간이 하천생태계의 복잡한 과정에 대해 축적한 과학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고, 수자원개발 혹은 유량 변경이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적응형 관리법’은 '실천을 통해서 배운다'는 모토로 반복적인 실험을 통해 사회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몫과 자연이 필요로 하는 몫의 물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최적의 균형을 찾아간다. 

이 과정에서 저자들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 합의’다. 하천 관리는 유역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이해당사자가 모여 광역협의체를 만들고 합의를 통해 법과 제도를 바꿔나가야 한다. 또, 관련 법안은 로마법대전의 ‘자연법에 기초하여 공기와 흐르는 물, 바다, 해안을 인류의 공유물로 한다’라는 공공재의 공공성에 충실해야 한다. 이런 원칙에 따라 지금 당장 행동할 것을 요구하고 무엇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겸손한 태도가 기본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는 국민 전체보다 업자, 특히 일부 대기업의 이익을 우선시 하는 정부의 전력정책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사실 전기와 원전에 관한 이론을 잘 몰랐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 그래도 이 책은 서문에서 밝힌 대로 되도록 간결하게 전기 이론을 설명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정책’ 의 불합리를 부각시켰다.

강하게 남은 것은 우리나라의 ‘중앙집중식 발전방식’ 이었다. 대표적인 것은 원전과 석탄화력 발전소로 대규모 발전소를 짓고 소비지까지 송전선을 건설해 전기를 보내는 방식이다. 바로 이 같은 발전방식이 밀양과 청도 삼평리 할머니들을 싸움터로 나가게 했다. 저자는 대안으로 ‘지역분산형 발전방식’과 지자체와 기업의 ‘에너지 자급률’을 얘기한다. ‘지역분산형’은 전기를 소비하는 곳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것이다. 지역분산형 발전을 하면 송전선 건설에 따른 분쟁도 사라진다. 뿐만 아니라 ‘에너지 자급률’은 다양한 에너지 개발로 재생가능 에너지 발전을 이끈다.

책에서 언급한 발전 방식의 문제는 <생명의 강>에서 주장하는 ‘유역별 거버넌스’처럼 정책이 지역과 당사자 중심의 합의로 이뤄져야 한다는 정치의 중요성을 확인케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기요금의 결정은 중앙정부의 몫이다. 정부의 정책을 바꾸려면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의 역할은 국민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만의 책임이 아니다. <생명의 강>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안전한 에너지 생산과 소비를 위해서 독자가 나서서 ‘많이 알리고, 행동하라’고 주문한다.

두 권의 책에 공통적인 제언은 통계 수치로 표준화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과 관련 있는 정책 결정 과정이 ‘정치의 문제’라고 말한다. 예컨대 다수결의 원칙, 절차의 중요성과 최대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한다는 형식성이 ‘표준화’에서 배제되고, ‘다수결’에서 제외된 ‘소수’를 소외하는 배타적인 방식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형식만 갖추면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도 민주적일 때 대상이었던 타자가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식될 것이다.

연이은 독서가 내게 ‘쥐 잡는 격’으로 남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자연과 인간을 관계와 변화의 측면이 아니라 수단과 목적으로 나누는 방식이 가부장제의 사고체계와 너무 닮았다. 남성/여성, 서양/동양, 백인/유색인종, 인간/자연, 제국/식민의 이분법은 남성을 기준으로 우등과 열등을 나눈다. 그래서 수많은 열등한 타자의 아픔이 세계의 고통임을 뒤늦게 깨닫는 변화가 신드롬으로 번진다. 새 패러다임은 시대적 조류다. 너무 늦지 않게 강을 본래의 모습에 가깝게, 안전한 에너지를 근거리에서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으로 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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