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민주화는 작년 선거 국면에서뿐만 아니라 장하준, 정태인 등 유명한 경제학자 간 한국 경제 성격 논쟁에서도 뜨거운 쟁점이었고 올해 역시 마찬가지다. 1,600만 명의 경제활동 인구 중 900만 명의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 하루 40명 이상의 자살, 극심한 빈부 격차라는 극악한 고통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관심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재벌만 해체되면 경제민주화가 된다든가 자유주의적 법규와 질서만 갖추면 경제민주화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만이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민주주의가 정말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 아니면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은폐, 왜곡하려는 술책인가? 정치에서 민주주의란 국가 의사 결정권이 국민에게 있는 경우를 말하듯이 경제민주화 역시 필요한 분야의 생산량과 생산방식, 생산과정, 분배 등을 국민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재벌이 해체되고 자유주의 질서만 갖추면 이런 일이 일어날까? 물론 절대 일어날 수 없다.
왜 절대 일어날 수 없을까? 그리고 실업과 불안정 고용, 장시간 노동, 청년 실업의 고통으로 대표되는 한국 자본주의와 유로존 사태와 그 원인을 제공한 미국의 서브프라임 등 위기에 직면한 세계 자본주의는 과연 어떻게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일까? E. K. 헌트의 ‘자본주의에 불만 있는 이들을 위한 경제사 강의’는 경제민주화가 무엇인지, 자본주의의 실체가 궁금한 이들에게 여러 경제 이론을 쉽고 정확히 알려주는 경제사상사이다. 특히 경제에 관심은 있지만, 너무 어려워서 접근을 못 하는 초보자나 불안한 자본주의를 해석하고 바꾸는 데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의미 있는 책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경제학 교과서나 경제사상사는 대개 자본주의의 실제 현실이나 역사적 흐름과는 거리를 둔 채 추상화된 논의에만 몰두한다. 또한, 신고전파 경제학을 바탕으로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만 살펴본 뒤 케인스주의나 후생 경제학 등 이단적인 흐름은 부록으로 다루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은 아예 무시한다.
이런 현실에서 미국의 진보적인 학술 단체 급진정치경제학연합에서 활동한 E. K. 헌트의 이 책은 1972년 처음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일곱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관심을 받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사상사이다. 《소유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1979년에 한국어판이 출간된 적이 있지만, 군부 독재시절이었기 때문에 책이 기형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고 마르크스 이론 역시 제대로 소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책은 2003년 개정 7판을 새로이 번역했다. 신고전파 중심의 주류 경제학과 그 허구성을 비판하는 급진주의 경제사상과의 대결의 역사를 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약과 부록을 통해 경제 이론의 핵심도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자본주의적 모순과 갈등을 완화하고 응집력을 높이기 위해 자본주의가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를 검토하고 있다. 그럼 헌트를 따라서 자본주의 역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자본주의 탄생과 고전적 자유주의
농업 생산성의 증대는 봉건주의가 해체되고 자본주의가 출발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16세기는 낡은 봉건 질서와 상승하는 자본주의 사이의 분수령이 되는 시기이며 이 시기에 가장 큰 변화는 노동 계급의 형성이었다. 인클로저 운동을 통해 소작인의 3/4, 내지 9/10가 농촌에서 쫓겨나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화폐지대가 터무니없이 오르면서 많은 농민, 자작농, 소귀족이 파산했다. 그뿐만 아니라 길드의 많은 장인들도 파산하였다. 한편 항해술의 발달에 힘입어 많은 금/은이 유럽으로 유입되고 이는 물가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자본가는 실질 임금이 낮아진데다 원료를 사서 재고를 보관하기만 하면 높아진 가치 덕분에 많은 이윤을 얻었다. 금/은의 유입 외에 선대제, 인클로저 그리고 식민지 약탈, 노예무역 등으로 자본은 시초 축적을 한다.
고전적 자유주의가 결정적인 지배권을 얻으면서 개인주의 철학은 중세부터 중상주의 시대까지 존재하던 가부장적 세계관을 깨트리면서 새로운 자본주의 질서의 요구를 반영하였다. 개인주의는 경제를 국가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을 반대하였고 국가가 부여한 독점권과 온갖 형태의 보호와 특혜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판매자와 구매자가 자유롭게 경쟁하는 시장이 적절한 균형을 맞추어 사회에 가장 큰 이익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사례는 종교개혁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이윤 추구라는 탐욕을 종교적 비난으로부터 해방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동기를 미덕으로 변화시켜 주었다. 이 교의는 인간의 죄가 종교적,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 따라 용서된다는 점에서 가톨릭 성직자들의 권력이 약화하었고 중간 계급의 사업 활동을 승인하는 종교적 기틀을 마련했다.
고전적 자유주의의 심리적 신조는 인간 본성을 자기중심적이고 냉정하게 계산하며 본질적으로 활성이 없고 원자적이라고 여겼다. 특히 이기주의는 쾌락주의와 결합하여 나타난다. 어떤 쾌락을 추구하고 어떤 고통을 피할지에 관한 결정은 상황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합리적으로 평가하는 데 바탕을 둔다. 여기서 이성은 쾌락을 극대화하고 고통을 최소화하는 선택을 하기 위해 여러 대안을 검토할 것을 지시한다. 그리고 활성이 없다는 견해는 쾌락 추구나 고통 회피가 인간의 유일한 동기라는 관념에서 나온다. 이런 교의가 낳은 결과는 노동자들은 게을러서 큰 보상이나 굶주림, 궁핍에 대한 공포를 통해서만 노동자에게 일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상층 사람들은 야심이라는 동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엘리트주의가 내포돼 있다. 그래서 엘리트들이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게 하려면 국가가 개인 재산의 보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믿었다. 원자론은 사회보다 개인이 더 근본적인 실재라는 의미이다. 이런 원자론적 심리학은 사회와 관계없이 개인의 성질이 독립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며 사회제도는 개인들을 위한 수단이자 개인들이 만든 작품으로 여겨진다.
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을 반대했음에도 고전적 자유주의자들 특히 애덤 스미스는 외적 방어, 불의에서 시민을 보호하는 일(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자를 제재), 공공시설/사업 추진을 국가의 역할로 꼽고 있다. 흔히 애덤 스미스는 자본가의 대변인도 아니었고 대체로 자본가들을 의심하고 불신한다고 하지만 자본가들은 스미스의 주장을 활용하여 이윤을 추구하는데 방해가 되는 가부장적 정부의 흔적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가 말하는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도 실상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에게 유리할 때는 얼마든지 가부장적 국가를 지지한다. 외적 방어는 국외 시장을 보호하고 확대하는 데까지 적용된다. 그리고 다른 시민들이 저지르는 불의에서 시민을 보호하는 구실의 내용은 개인의 재산 보호와 계약의 이행으로 정의됐다.
자본가들이 정치/경제 권력을 갖게 된 것은 생산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유관계를 보호하는 구실을 정부에 부여한다는 것은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지배 계급인 자본가들의 권력의 원천을 보호하는 일을 정부에 맡긴다는 의미이다. 즉, 이윤 추구에 위협이 되는 노조 운동이나 차티스트 운동을 짓밟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공공시설/사업의 추진은 단일한 통화, 표준 도량형, 도로, 운하, 항구, 철도, 우편 서비스 등등을 의미하고 이는 기업 활동을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즉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간섭이 자본가들의 이익에 해로울 때는 반대하지만, 이윤을 늘려주면 적극 환영하였다.
사회주의 운동
노동자들은 산업혁명기에도 생활 수준이 상대적으로 하락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수공업 체계에서 기술자로서 누리던 자부심과 친밀한 인간관계 대신 비인격적 시장이나 금전적 관계를 통할 수밖에 없었고 시장의 조건에 생계를 의존하는 단순한 노동력 판매자로 전락했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부속물이던 기계가 생산과정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노동자는 작업 속도를 결정하는 기계의 단순한 부속물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폭넓은 분업화와 기계화는 남성보다 훨씬 순종적인 여성과 아동 노동까지도 고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산업자본주의는 노동 계급의 비참한 고통 위에 세워졌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불평등에 맞선 항의였다. 모든 사회주의자는 특정의 사회철학이나 교의 체계를 만장일치로 받아들인 적은 없지만,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탓에 불평등이 생겨났기 때문에 자본의 사적 소유 폐지는 공통의 의견이었다. 19세기 초의 사회주의 그룹 중 하나인 고전적 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사회주의 역시 자본의 사적 소유를 반대했고 그중에서도 토머스 호지스킨이 가장 대표적이다. 호지스킨은 자본이 생산적이라는 통념을 반박하면서 자본의 행위로 돌려지는 생산은 실제로는 상호 의존하는 노동자들의 행위라는 점을 보여줬다. 예를 들어 어부가 그물의 도움을 빌려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때,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자는 물고기 중 일부는 어부의 노동으로 나머지 일부는 그물의 도움으로 잡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물이 생산적이고 그물을 소유한 자본가가 그물의 생산성에 기인하는 이윤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호지스킨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다른 노동자들이 그물을 만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물고기는 어부와 그물 노동자 두 사람의 공동 노동을 통해 잡은 것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잡는 곳에 그물 노동자는 없어서 그물 노동자가 수행하는 몫은 실제로는 노동자가 만든 제품, 그물을 통해 수행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한 노동자가 자본의 생산성에 의존하고 따라서 자본가들에게 의존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겉모습은 사실이 아니다. 노동자는 오직 다른 노동자들이 수행하는 공존하는 노동에 의존할 뿐이다.
소유권은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고 특권과 그에 따른 제재를 규정하고 정당하게 강제력을 행사한다고 믿어지는 강제기관을 통해 강제적으로 확립된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는 주식 소유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소유에 따른 권리는 노동 과정을 감독, 지휘, 통제하는 관리자 지명과 노동자들이 창조한 잉여가치에서 몫을 받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은 물건을 생산하는 분투보다 자본가는 훨씬 더 극심한 분투를 치르기 때문에 이윤, 이자, 지대는 분투와 절제라는 희생의 대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런 논리를 비역사적 인식이라고 비판하며 어떤 사람이 자본가가 되는 데 필요한 절제와 분투에는 사회에 관한 기여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누군가가 공장을 사려고 평생 저축했다면 자기만을 위해 저축한 것이고 오히려 이런 노력은 지배 계급에 진입하는 장벽이 높다는 사실을 반영할 뿐이다. 그리고 과거 자본가가 없을 때도 사회경제 체제는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둘째는 희생과 절제로 자본가의 소득을 정당화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어떤 사회든지 지배 계급의 부와 권력, 소득(노예제 사회의 노예주)도 희생과 절제로 정당화할 수 있다. 그리고 대다수 자본가는 자본 소유를 상속받았다. 상속받지 않은 자는 자제한 덕분이 아니라 무자비하고 약삭빠르며 속임수에 능하고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자본은 다른 생산 요소(토지, 노동)들과 마찬가지로 생산성에 근거해 보상을 받기 때문에 어떤 착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자본은 도구를 포함한 생산수단이고 생산에서는 도구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자본도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마르크스는 도구는 자본이나 이윤이 존재하지 않은 사회에서도 사용했기 때문에 도구 그 자체는 자본이 아니라고 한다. 생산이란 인간이 자연을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이 무언가를 생산했다는 것은 자연이 인간이 사용하기 알맞게 스스로 변형됐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도구가 스스로 뭔가를 생산한다는 생각도 혼동의 결과(물신 숭배)일 뿐이다. 현대적 생산에서 도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는 생산이 사회적이며 생산자들이 상호 의존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목수는 망치, 못, 톱, 목재를 사용하여 집을 짓는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들은 목수와 더불어 망치 1개, 못 몇 개, 톱 1개, 목재 등이 목수와 더불어 집을 지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집을 지었으며 일부는 망치를 생산하고 다른 이들은 각각 못과 톱과 목재를 생산하고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생산 과정의 마지막 단계(목공)를 수행함으로써 이 모든 인간적 노력을 결합하는 식으로 노동을 분담했다고 주장한다.
사실 자본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특수한 사회관계의 집합이라는 맥락에서 상품으로 판매되는 도구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자본은 다음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도구가 상품으로 생산되고 이 상품을 생산에 사용하는 계급이 아니라 다른 계급이 소유하며 도구를 사용해서 생산하는 계급은 자신들이 만든 생산물의 소유권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모든 생산적 상호 의존에서 한 노동자는 다른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하지만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은 결코 서로 상대하지 않는다. 노동의 상호 의존은 자본가들 사이의 경제적 거래에서 효력이 발생한다. 즉 노동의 상호 의존은 모든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지대와 이윤이 단순히 생산에 필수 불가결한 토지와 도구의 물리적 성격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관계가 감춰진다고 봤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가장 큰 악폐는 노동자들의 물질적 박탈보다 개인이 한 인간으로서 지닌 잠재력을 성취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가로막는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동의 과정을 자본이 통제하기 때문이다. 생산은 사회적으로 동등한 인간끼리 협력하면서 서로 간에 애정과 상호인정의 유대가 발달하고 이런 노력은 심미적으로 발전하는 원천이기도 하다. 자본가가 보기에 임금은 또 다른 생산 비용에 불과하고 노동은 구매해서 이윤을 얻을 수 있을 때 사들이는 상품이 된다. 그런데 노동력을 파는 것도 비인격적 시장 조건에 좌우되고 노동의 산물 역시 자본가의 소유가 된다. 즉 마르크스는 인간의 개인적 발전을 방해하고 소외된 시장을 인간생명을 유지하는 활동의 상품으로 만드는 노동 계급의 타락과 철저한 비인간화를 가장 비판한다.
지금까지 이 책의 일부인 자본주의 탄생과 그 이데올로기인 고전적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를 통해 그 허구성을 폭로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살펴봤다. 이처럼 이 책은 단지 경제학과 경제사만을 다루지 않고 주류의 이데올로기를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비판한 시각도 다루고 있다. 또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론을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면서 자본의 가치 기여 주장에 대한 비판에 많은 지면을 활용한다. 헌트의 관점이 명확히 나타나고 있는 마지막 구절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겠다.
‘사회주의는 산업혁명과 더불어 태어났고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를 근절하기 위해 줄곧 싸웠다. 또한, 자본주의를 완전히 철폐하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회를 세우려고 줄곧 싸웠으며 앞으로도 그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언제까지나 더 나은 사회를 창조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발언하고, 글을 쓰며, 조직하고 행동할 것이다. 동유럽 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 역시 생명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에 기반해 평가하자면 사회주의는 이제 사실상 사회주의 사상과 거리가 멀던 정부들과 한데 묶이는 오명을 벗어 던지게 됐으며 20세기에 대부분에 유지하던 것보다 더욱 밝은 장기적 전망을 갖게 됐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 뉴스클리핑은 http://newsdg.jinbo.net에서 발췌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