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마무리될 즈음 나는 12월 달력을 보면서 15일이란 날에 동그라미를 친다. 이제 연례행사가 되었지만 꼭 추모곡을 불러야 할 날이기 때문이다. 조수원 열사. 파노라마처럼 여러 생각과 장면들이 스쳐 지나간다.
조수원 열사는 대우정밀에 입사, 병역특례자로 편입되어 4년 6개월을 복무하던 중 노조 편집장을 맡았다가 1991년 6월 복무만료 6개월을 남기고 해고되어 병역특례자 신분을 박탈당했다. 1993년 마포 민주당사에서 38일 동안 단식 농성을 했고 대우 그룹으로부터 1994년 5월 27일 복직합의를 받아냈다.
그러나 정부는 병역문제는 복지합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병역특례 해고자들에게 입대할 것을 요구했다. 정든 일터로 돌아가고 싶다. 어머니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고 싶다며 간절한 소망을 말하던 조수원은 1995년 12월 15일 새벽, 부당징집을 거부하며 민주당 서울시 지부에서 목메어 세상을 버렸다.
조수원은 나와 동갑이다. 아마 세상을 등지지 않았다면, 나와 인연이 되어 막걸리 잔을 꽤 기울였을 것이다. 조수원 열사는 20대 청춘을 올곧이 노동자로 살았다 20대의 절반을 병역특례자로, 그리고 절반을 수배자로. 그때 함께 투쟁했던 동료들은 조수원 열사의 항거로 복직이 되었지만 12월의 하늘은 여전히 조수원의 하늘이었다.
갓 노래 부르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하고 나서 나는 대우정밀의 해고자들과 함께 했다. 수배 중이었지만 그들과 노래연습도 했고, 집회에도 나갔고 술잔도 기울였다. 조수원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폐증인 아버지와 가족을 위해 공고를 나와 대우정밀에 입사한 것이다.
수배중의 일기를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수배중이어서 명절이 되더라도 고향에 가지 못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향마을에 몰래 스며들어 언덕배기에서 집을 내려다보면, 여지없이 형사들이 집 앞을 지키고 있어 발길을 돌려야 했던 조수원. 조수원 열사는 목숨을 버리고도 차가운 냉동실에 오랫동안 머물러야 했다.
나는 조수원의 장례식 전날 밤새워 두곡의 추모곡을 만들어야 했다. <스물아홉 노동자 청춘> 이란 노래와 <전진 또 전진>이란 노래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고 나는 또 한곡의 노래를 만들었다. <아들에게>란 노래다. 나는 아직 자식이 없다. 내가 겪었던 어머니와의 추억을 미루어 짐작할 뿐이다. 허나 이 노래는 노동자 조수원의 노래다.
열사를 기리는 노래가 세곡이나 되니 내 20대 청춘과 삶도, 그들의 투쟁을 말하지 않고는 내가 아닌 게 되었다. 이젠 시간의 터널을 지나 빛바랜 사진이 되었지만 20대의 나날이 여전히 아프다.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내 청춘의 노래와 추억에는 네 분의 열사가 있다. 박창수 열사와 조수원 열사, 김주익 열사와 곽재규 열사가 그들이다. 한결같이 푸른 작업복의 노동자들이다. 김주익 열사가 세상을 등졌을 때는 나는 너무 무기력해서 노래를 만들지도 부르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노래하기가 너무 힘들었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전 조수원 열사의 17주기 추모제에서 노래했다. 추모제가 끝난 다음 형, 동생하며 함께했던 분들과 환하게 웃는다. 모두 마음 한구석에 흑진주 같은 응어리가 하나씩 있지만 그래도 웃는다. 12월은 춥기도 하지만 나를 돌아보게 한다. 한 해의 마무리가 아니라 스물아홉 노동자 청춘을 바친 한 노동자의 영정 앞에서 내 삶을 되짚어 본다.
이번 글에서는 조수원 열사 추모가의 가사와 음반에 실린 <아들에게>노래를 들려 드린다. 내년에는 나보다 현장에 있는 동지들이 추모가를 불렀으면 좋겠다. 이 노래들은 가사로 읽어도 좋겠다 싶다.
대통령을 뽑는단다. 그 대통령 선거일보다 조수원의 하늘이 보이는 건 그래도 아직 노동자의 하늘이 내게 남아있나 보다. 나는 내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이 된 적이 없다.
스물아홉 노동자 청춘 - 글/곡 우창수
차디찬 시멘트 바닥 허공사이에 지친 몸을 누이고
퀭한 두 눈에 비친 별빛만이 당신의 설움을 위로 하는가
광부의 아들에서 노동자로 오직 인간답게 살고자
꿈에도 그리던 출근부 당신의 이름 석자 조수원
주린 배 움켜쥔 수배의 날에 잊지 못할 동지의 환한 웃음
끝내 싸워서 어머니 따듯한 품속에나 묻힐 것을
천만노동자의 맹세를 부른 영원한
스물아홉 노동자 청춘을 이렇게 바치는 구나
아들에게 – 글/곡 우창수
이 험한 세상에 너를 보내고 자리걱정 끼니 걱정에
올해도 올 수 없는 너이지만 생일상을 차렸다
간밤엔 낯 설은 바람에 놀라 맨발로 대문 나서고
식어버린 미역국이 너의 빈 자릴 채우는 구나
차라리 감옥이라면 얼굴이라도 마주 볼 것을
기어이 갈 길이면 손이라도 잡아 줄 것을
사람답게 사는 것이 내가 말한 이 길이더냐
내 아들이 사는 것이 노동자의 길이더냐
아들아 서러워 마라 비굴하지도 마라
언제나 내가 올 길에 마지막 품이 되 주마
이제 나는 대문 밖 길을 밝혀 밤을 지새마